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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에 눈폭탄이 쏟아진 날 3

미국이나 아이티나...

오늘로 워싱턴에 폭설이 내린지 일주일이 됩니다. 일주일동안 눈 취재로 바빴습니다. 다시 사건기자 시절로 돌아간 듯 했습니다. 워싱턴 특파원으로 오자마자 아이티 지진 현장을 다녀오고 나흘정도 빼고는 온통 현장을 돌아다닌 것 같습니다.

공교롭게 두 개의 현장이 자연재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더군요. 차이점이라고 하면 한 쪽은 가난한 나라고, 다른 쪽은 부자 나라라는 것, 거기서 기인한 근원적 차이 때문에 인명피해에서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도 큰 차이겠죠. 아이티 얘기는 나름 많이 해드렸으니까 오늘은 미국 폭설 얘기를 좀 더 해보겠습니다.

올 겨울 누적 적설량이 워싱턴만 해도 140cm에 이릅니다. 볼티모어 같은 경우는 160cm를 훌쩍 넘었고요. 이렇게 글로 쓰다 보면 그런가 보다 하지만 막상 저도 당하고 보니까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선진국이고 뭐고 솔직히 다르지 않습니다. 길은 온통 눈투성이고, 버스나 지하철은 다니지도 않고, 택시는 불러도 오지 않고... 어디 다닐 일 있으면 걷는 수 밖에 없습니다.씩씩하게...

저희 집에서 SBS 워싱턴 지국까지 걸어서 한시간 반 거리라는 것도 그래서 알았고, 지하철이 다시 개통된 뒤에는 가장 가까운 텐리타운역에서 집까지 30분거리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스키타고 다니는 미국인,폭설속에 조깅하는 미국인 모습 TV에서 보셨죠? 그런 친구들 많습니다. 그냥 걷는.. 집에만 있기 갑갑하니까 그렇겠죠.하여튼 폭설은 문명의 이기를 무력화시키고,그래서 선진국 국민들도 이동수단은 두 다리밖에는 없었습니다.

폭설은 곳곳의 나무를 쓰러뜨리고, 스미소니언 박물관 창고 지붕을 무너뜨리고, 공항 항공기 격납고도 무너뜨리고, 전봇대를 넘어뜨리고,전선을 끊어버렸습니다. 눈 덮힌 도로를 조심조심 운전하고 가는데 인적없는 큰 길에 나무가 쓰러져 있고, 위로는 전깃줄이 낮게 드리워져 있는 모습을 보고는 공포심을 느꼈다는 미국인도 만났습니다.

또 일주일동안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추운데 난방도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아직도 2만명이라고 합니다. 각 지자체에서 임시 수용시설을 만들었는데, 거기 가지 않은 사람들은 자연환경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수 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웬만한 미국 가정에는 나무를 떼는 화로가 있는데요, 나무를 사든지, 패오든지 해서 불을 피워서 추위를 피하고 있을 겁니다. 불을 피워 추위를 나는 모습, 예전 그대로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연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거대한 자연의 작용앞에서는 세계 최강대국 미국도 어쩌지를 못하는 걸 보면서 더욱 실감했습니다. 111년만의 폭설이라고 하더군요. 미국과 미국인들이 겸손해질 수 있는 계기가 몇년에 한 번씩은 있었다고 하는데요, 그런 큰 사건사고,참화속에서도 오늘의 미국을 이룩한 데 대해서는 칭찬을 해줘야 할 듯 합니다. 오만함을 버리지 못하는 것에는 물론 채찍이 필요하겠지만요...

이 시대 워싱턴 일원에 산 미국인들은 "아,내가 살아있는 동안 이런 기록적인 폭설이 오다니.."하는 감정이입에 아마도 죽을 때까지 "내가 큰 눈을 겪어봐서 아는데, 2010년 겨울 얘기 들어봤나 모르겠네..."하는 말이 입에서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우리도 주변에서 그런 어른들 많이 보지 않았습니까?

덧글 : 눈 오는동안 오가면서 보고 들은 인상적인 장면...

1. 눈에 갇힌 차를 보면 지나가던 미국인들은 어김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준다. 확률로 보면 절반 정도는 그렇다. 영어책에서 배웠던 "May I help you?"가 정말 많이 들린다. 기자도 며칠 전 차를 갖고 나왔다가 주자창 바로 앞에서 눈에 갇혀 버렸는데, 두 차례나 미국인들이 도와줬다. 모르는데도... 물론 최종적으로는 이런 날이면 직업적으로 돌아다니면서 몇달러씩 받고 눈청소해주고 차 꺼내주는 것을 도와주는 히스패닉 사람들의 도움으로 벗어났지만, 미국인들의 친절과 배려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2. 미국 주택중 절반 정도는 노상주차를 하게 돼있다. 눈이 와서 차를 운전할 수 없다 보니 대개 눈을 흠뻑 뒤집어 쓰는데 말 그대로 차가 눈에 잠긴다.며칠 지나 차를 꺼내려면 농담이 아니라 서너시간 걸린다. 이 일을 미국인들은 혼자서도 잘한다. 가족이나 친구가 있으면 도와주지만 그렇지 못하면 혼자 한다.젊은 여성들이 혼자서 차를 꺼내느라 삽질 하는 모습 많이 봤다.

3. 버스는 눈이 조금만 와도 끊긴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승객 여러분의 안전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눈이 그칠때까지 운전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한다. 물론 불평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으레 그러니까.. 그런 면에서 보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365일 운전하는 우리네 버스회사들은 승객 안전이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나? "는 의문이 든다. 물론 아닐 것이다. 한국인들은 용감하니까...

지하철은 눈이 약해지면서 지하구간만 운행한다. 배차시간이 평소 5분에서 20분, 25분 중구난방이다.어제 아침에는 무려 50분을 기다렸다. 그런데 플랫폼을 꽉 채운 미국인들 조용하다. 불평하지 않는다.앉아서 책을 보든 서서 음악을 듣든, 아무 것도 안하든 그냥 50분을 잠자고 기다린다.

이 사람들은 성질들도 없나? 아니면 급한 약속들도 없나? 하는 생각에 물어봤더니 "눈이 와서 난리인데 운행하는 것만도 다행이지 않느냐?"고 답한다. 조금만 늦어도 난리가 나는 대한민국 지하철의 모습과는 분명 달랐다.

아, 지하철 상당히 구식 느낌이 난다. 오래된 듯하다는 얘기다. 그런 면에서 보면 대한민국 지하철은 상당히 깨끗하고 신식이다. 그리고 텐리타운 에스컬레이터 정말 아찔하다. 이대입구역인가가 그랬나 모르겠는데, 하여튼 경사도가 대단하다. 어느 날인가는 올려 보다가 식은 땀까지 흘렸다.

                  


4. 미국인들은 영웅담을 좋아한다. 워싱턴dc 시장은 "이런 눈을 뚫고 제설작업을 하는 분들이 영웅"이라고 한다. 언론매체들은 나름 줏어듣거나 목격한 얘기를 영웅담으로 풀어대느라 바쁘다. 버지니아 애넌데일 지역에서는 출산이 임박한 주부를 위해 이웃사람 수십명이 나와 큰 길까지 몇십미터의 눈을 치워서 임산부를 무사히 병원까지 가게 했다는 얘기가 보도됐다. 그 이웃들을 영웅이라고 했다. 미국 언론의 이런 보도방식과 헐리우드 액션영화 스토리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 것이 미국을 강하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5. 눈이 계속 오면 이 사람들은 제설작업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 어차피 해도 눈이 쌓이니까.. 사람 다니는 길,즉 인도도 제설작업은 하지만 인도와 인도 사이, 가령 차도가 휘어지면서 인도가 끊긴 부분은 하지 않는다. 인도에서 잘 걷다가 이 부분을 만나면 쇼를 해야 한다. 무릎 이상 들어가는 눈을 조심스레 밟아야 하고 눈이 녹아 발목이상 잠기는 물도 조심해야 한다. 인도나 차도 모두 누군가 책임지고 제설작업을 하지만 그 사이는 누구 책임인지 몰라서인지...

6. 눈이 많이 오니 대형식품매장에도 새로운 물건들이 납품되지 않는다. 폭설예보 보고 한 번 사재기 바람이 지나가고, 그 다음에 눈이 계속되니까 또 한 번 사람들이 휩쓸고 지나가고.. 그래도 남은 식품들은 절대 사면 안된다. 야채에서는 진물이 나오고,빵이나 이런 것들은 유통기한이 지나고... 남긴 이유가 다 있다.

--- 어제는 아이티 지진현장에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아직도 무너진 건물들이 많고, 그 안에 시신들도 많고, 곳곳에 쓰레기도 많을텐데 비가 오면 혹 전염병이 많이 돌까 걱정됩니다. 지진 직후의 공황상태를 간신히 넘기고 본격적인 복구작업에 들어가야 할 나라에 더 이상의 비극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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