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질곡의 땅, 아이티를 다녀 왔습니다. 개인적인 고생을 거론하기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아이티의 현실은 참담했습니다. 가는 곳 마다 무너진 건물들이었습니다. 보이는 것마다 하루하루 살아내기 버거운 난민들의 모습이었습니다.가슴속 평정을 잃지 않고 취재하는 일이 힘들었습니다.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슬픔만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아이티에 도착한 다음 날, 지진 피해가 가장 컸다는 도심으로 나가 봤습니다. 치안이 불안하다는 말에 산더미 같은 긴장이 밀려 왔습니다. 별 일은 없었습니다. 위 사진 속 장면이 눈과 가슴에 새겨졌습니다. 무너진 아이티 대통령궁입니다. 우리 식으로는 청와대가, 미국으로 치면 백악관이 무너진 셈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이 살던 동네가 무너진 것은 그럴 수 있다고 해도 한 나라의 대통령이 사는 곳이 속절없이 무너진 것은 그냥 넘어가기 어려울 듯 합니다. 즉, 대통령궁까지 무너지는 나라에서 도대체 무얼 기대할 수 있겠느냐는 역설이 가능하다는 얘기겠지요.
이 앞에서 저는 이런 기사를 썼습니다.
"저는 지금 아이티 대통령궁 앞에 서있습니다. 위풍당당했던 모습은 찾아 볼 길 없이 무너져 버린 대통령궁은 국민의 신뢰와 존경을 잃어버린 이 나라 대통령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합니다."
실제로 프레발 아이티 대통령은 지진이 일어난 지난 12일부터 이틀동안 행방이 묘연했습니다. 미증유의 참사로 온 국민이 고통받고 있을 때 그들 곁에서 같이 아파하고 큰 힘을 보태줘야 할 대통령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틀 뒤에 그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아이티 지진 참사 현장이 아니라 이웃나라 도미니카 대통령궁이었습니다.
그의 부인이 "언론에 보도가 되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남편은 지진 나던 날 밤, 한숨도 못자고 지진 현장을 돌았어요. 자기 자식들의 안위는 물어보지도, 챙겨보지도 않고 말이지요."라고 뒤늦게 거들었지만 성난 민심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취재 현장 곳곳에서 만난 아이티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지진이 일어난 지 일주일이 지나서 공항 근처 조그만 경찰서에 아이티 임시정부 청사가 마련됐습니다. 그 앞에서는 연일 반정부 시위가 계속됐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간단했습니다.
"저 아이티 깃발을 내리고 미국 깃발을 올려다오"
"구호품을 아이티 국민에게 나눠줘라. 정부에게 주면 그들의 배만 불린다"
고난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희망이 있으면 버티어 냅니다.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이 역사가 그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힘든 시절에 국민의 앞에 서있어야 할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면 손톱만큼은 됐던 희망마저 찾아보기 어렵게 됩니다. 몽고군의 침략에,청나라의 침략에,그리고 북한의 침략에 국민들은 나몰라라 하고 도망가기 바빴던 우리네 조상들이 생각났습니다.
지금 아이티 사람들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대재앙앞에 절망과 무력감을 곱씹고 있습니다.한편에서는 질곡의 사슬을 끊을 생각은 않고 자신들의 안위만 우선하는 권력자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키우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분노가 조금은 힘이 되어줄 지도 모르겠습니다. 슬프지만 말이죠.
아이티를 떠나기 전날, 강성주 주 도미니카 대사가 아이티 총리를 면담하기로 돼있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강대사 뒤를 따라 임시정부 청사로 들어갔습니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가기 힘들 정도로 좁은 복도에서 총리 일정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주변이 부산해 졌습니다. 돌아보니 키 작은 아저씨 한 명이 서있더군요. 속으로 "뭐야, 저사람?"하고 무시하려는데 주위의 아이티 사람들이 이러더군요.
"마이 프레지던트!"
... 이 글을 시작하면서 줄기차게 제가 비판하고 있는 그 사람, 바로 아이티 대통령이었습니다. 일단 무작정 마이크를 들이대고 질문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이 아이티를 돕고 있는데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한말씀"
" 앞으로 지진 피해 복구를 위한 당신의 구상은?"
"뭐가 가장 시급한 일인가?"를 묻고 정말로 묻고 싶었던 질문을 하려는 순간, 이 노회한 정치인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표정과 말투로 이렇게 말하고는 돌아섰습니다.
"땡큐, 코리안 프레스"
...
제가 묻고 싶었던 말은 "지진 나던 날 밤 당신은 어디 있었는가? 지금 아이티 국민들은 우리에게 더 이상 정부는 없다고 하는데, 당신은 그런 국민들에게 무슨 얘기를 할 수 있는가?"였습니다.
사실 물어봤자 돌아올 답은 뻔했겠습니다만, 그래도 그 때 저는 묻고 싶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돋아나는 분노를 가슴에 부둥켜 안은 아이티 기자의 심정으로 말입니다.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