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예술이 새록새록 숨 쉬는 도시, 너른고을(광주)을 꿈꾸는 예비 문인들이 있다. 20대에서부터 5~60대까지 나이에 상관없이 '문학'이란 화두 하나를 십자가처럼 등에 짊어진 채 똘똘 뭉친 이들은 '너른고을문학아카데미'에서 1주에 한번씩 글쓰기에 미친 듯 매달렸다. 이들은 신용목 시인을 강사로 삼아 신경림, 정희성, 도종환, 김사인, 공광규 시인 등을 초청강사로 모시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꽉 막힌 강의실에만 틀어박혀 빵틀에서 굽는 빵처럼 엇비슷한 글들만 쓴 것이 아니다. 남한산성으로 가서 야외수업도 했고, 수종사로 문학기행을 가기도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저마다 고유한 색깔을 지닌 시"를 써보자는 뜻에서 <시색>(詩色)이란 동인모임을 만들어 첫 작품집 <머물거나 날아오르거나>를 펴냈다.
이들 예비 문인들은 말한다. "문학이라는 것이 억지로, 강제로 되는 일은 아니다"라고. 이들은 우선 문학을 꿈꾸는 몇몇을 위하여, 그 몇몇이 점점 더 많아지기를 바랐다. 이들은 지난 2008년 광주 출신인 석경징 서울대 명예교수로부터 문학이론을 배웠고, 2009년에는 그 문학이론을 주춧돌로 삼아 본격적인 창작을 하기 시작했다.
이들 예비 문인들은 습작품 한 편을 낼 때마다 주저하고 망설였다. 왜? "이렇게 글 같지도 않은 걸 내도 될까?"라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첫 동인지를 용감하게 펴냈다. 이들이 동인지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저마다 문학을 향한 작은 불씨를 마음 한 쪽에 소중히 품고 있었기에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그 작품집에선 풋풋한 풀내음이 풍긴다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것이 잠을 자고 밥을 먹는 것처럼 일상적이지도 않으며 더구나 학창시절 삼사십 년이 지난 이들에게 글쓰기, 시 창작이라는 글짓기는 열정과 용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가 문학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인간의 내면에 지닌 복잡하고 다양한 감성을 문학적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일, 그것은 결국 인간이 행해야 할 본연의 길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시색 동인으로 시인의 꿈을' 몇 토막
'너른고을문학아카데미'에서 '문학'을 삶으로 삼아 매주 1회씩 글쓰기에 매달려온 수강생들 동인모임인 '시색'이 첫 작품집 <머물거나 날아오르거나>(너른고을문학아카데미)를 펴냈다. 시, 시조, 산문이 실려 있는 이 책에는 시인 혹은 수필가가 되고자 하는 예비 문인들이 삶에 굴린 땀과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을 향한 꿈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정영례 시조 '소식', 강남율 '함지박', 고원예 '송광사 가는 길', 김정일 '도시의 꿈', 다찌바나 미찌요 '소나무와 호박꽃', 변정윤 '만월', 신명희 '김유정 문학촌에 비는 내리고', 이도화 '달빛', 이복순 '동창생', 이영자 '삶', 이해선 '미시령 풍경', 정무자 '인연', 정수경 '외딴방 밖에서', 정영례 '중년의 스케치', 정은영 '가을', 조형자 '내 신부' 등 시와 강남율 변정윤 신명희 이복순 이영자 정은영 산문이 그것들이다.
이들은 "대부분의 작품들이 처음이라는 수줍음을 달고 있다"고 말한다. 이어 "그래서 풋풋한 풀내음이 날 것이다"라며 "이 한 권의 작품집이 그들 스스로에게 '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작은 해답이 되고, 끊임없는 물음의 시작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때문에 이들은 한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있기도 하고, 하늘을 향해 맘껏 날아오르기도 하는 것이다.
내 시는 지느러미 없는 물고기
강남율은 "선 하나만 잘 그어도 반듯한 집이 세워지고 점 하나만 잘 찍어도 어엿한 시가 되는 걸 의심하다" 마침내 "시 한 줄도 쓰지 못하고 꿈을 꾼다." 그 꿈은 "지느러미 없는 물고기"처럼 맥없이 비틀거리며 물속 곳곳을 헤매고 있다. 왜? 시를 쓰면서 "알 수 없는 기호로 위장하고 가장한 외람됨"(내 시에 관하여) 때문이다.
고원예는 버스를 타고 송광사에 가면서 "먼지도 환하게 내장을 드러내는 오후 /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기다림이란 글자"가 "유리창에 타고 있다"고 여긴다. 그는 "억새밭 가운데 오래 서 있으면 / 저런 필적을 가질까"라고 물음표를 툭 던지며 "먼지 뽀얀 유리창에 / 남도의 가을은 손목이 없다"(송광사 가는 길)고 쓴다.
김정일은 '세월'이란 시에서 "망울망울 거미줄에 / 추억을 걸어놓고 / 희멀건 눈동자로 / 한올 한올" 풀어내며 "삼백예순다섯 망울 / 떠나야 하는 연습으로 / 거리를 배회한 흔적들이 / 투명하게 / 한 해의 곳간에 걸렸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래도 "집시처럼 한 해를 설계하며"(세월) 새로운 날들을 위해 새로운 꿈을 꾼다.
일본 유학생 다찌나바 미찌요는 자갈길을 걸으며 해송이 드리운 그림자 안에서도 어엿하게 피어난 호박꽃을 바라본다. 그는 해송과 호박꽃에서 "어색한 그림자도 닿을 듯 말 듯 / 나란히" 걷고 있는 자신과 그림자를 만난다. 항상 자신을 따라다니는 그림자는 마치 해송 "잎에서 떨어진 이슬 / 호박꽃 꽃잎 위에 / 구슬을 맺"(소나무와 호박꽃)는 것처럼 보인다.
변정윤은 "달이 기우뚱, 정지리 갈대숲에 앉"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할머니댁으로 가는 논둑길에서 "짝눈의 사마귀"가 메뚜기와 뒹구는 모습을 마음에 새긴다. 그는 "기우뚱, 발이 이을 때 / 기우뚱 할머니가 일어서고 / 기우뚱, 달도" 일어선다고 여기며, 달과 함께 신작로를 걷다가 "집 나간 아들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달밤이 모두 만삭"(만월)이라고 쓴다.
독자들이 작가 성적표를 매긴다
신명희는 비 내리는 김유정 문학촌에 서서 "독자들의 호기심은 작가의 성적"이라 생각하며, "아! 나는 무엇을 남기게 되나" 고민한다. 그때 "만무방(김유정 소설)의 응오(주인공)"가 나를 비웃는다. 하지만 그는 그들을 비웃는다. 그는 스스로 "실존과 존재의 그물 속에 / 일상의 굴레에 갇힌 존재"(김유정 문학촌에 비는 내리고)라고 여긴다.
이도화는 곱게 쏟아져 내리는 달빛이 "담장을 오르고 / 지붕을 오른다"고 쓴다. 그는 달이 "절구통"에도 뜨고, "양철통"에도 뜬다고 여긴다. 그래서일까. 달이 뜨는 밤마다 "달빛 담은 하얀 꽃"이 곱게 피어나고, 박넝쿨 "마디마디"에서도 달을 닮은 "동그란 박"(달빛)이 조롱조롱 매달리는 것만 같다.
이복순은 "끊어진 고무줄처럼 / 멀어진" 동창생을 오랜만에 만나며 어릴 때 추억 속에 잠긴다. 그가 어릴 때에는 "동네 큰 마당"에서 "여자 남자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놀았다. 그 중에는 "유난히 따돌림" 받던 아이도 있었고, "나름대로 멋을 낸 맵시"도 있었다. 그때 저만치 "산 아래 황혼이 빙그레 / 떨어진다."(동창생) 마치 저무는 청춘처럼 그렇게.
이영자는 남대천변 해바라기 축제에 갔다가 "남대천변 해바라기는 / 가시망토 두른 채 / 백만 송이 황금꽃들의 기도시간"이라 생각한다. 그가 바라보는 해바라기는 "고개조차 들 수 없는 / 천 개의 눈 무게에 힘겨워 / 고개"(남대천변 해바라기 축제)를 푹 수그리고 있는 것만 같다. 마치 나이가 많이 들어 저절로 허리가 꺾어지는 꼬부랑 할머니처럼.
이해선은 조상님 제사를 지내며 그리움에 몸부림친다. 제사상 앞에서는 "달도 없는 밤 / 조상님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 벽 속을 부산하게 걸어 나와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만 같다. "알싸한 향 내음"에 "알록달록한 제수들이"(그리움) 먼저 가신 조상님들을 위로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때 갑자기 눈가에 눈물이 맺히면서 또 한 번 그리움에 몸을 떤다.
정무자는 나무를 삶에 빗댄다. "하얀 속살을 우려내는 / 투명한 계곡을 밑둥으로 / 바위 위를 솟구친 열정 / 갈라진 등가죽은 아픔을 잊은 채 키워내는 큰 사랑"이다. "바람에게 서로를 비비"는 것은 외로움 때문이다. "어린 연두빛은 뜨거운 태양에 / 청록으로 타들어가고 / 지친 날개 잠깐 접는"(나무) 것은 편안한 푸르름이다.
정수경이 바라보는 세상은 지독히도 추운 땡겨울이다. "매일 밤 / 신호가 잡히지 않는 화면으로 꿈"을 꾸지만 "뜨거운 것이 자꾸만 빠져" 나간다. "한 장 뿐인 연탄을 갈면서 / 허옇게 질식된 시간"을 셈하고, "마른 북어처럼 매달려 있는 형광등"도 온기를 몰아낸다. "내일은 봄", "모레는 여름"(외딴 방 밖에서)일 거라고 여기지만 늘 땡겨울 찬바람뿐이다.
정영례는 중년을 스케치하고 있다. "바람에 구름이 밀려 / 허물을 벗는 어둠처럼 / 헐거운 중년의 여유로움이 / 손바닥에 추억을 그린다." 그가 바라보는 손바닥에는 "술렁이는 보리밭"이 펼쳐지기도 하고, "냇물이었다가 / 다이아표 검정 고무신이 건져 올린 / 파라미 몇 마리"(중년의 스케치)가 팔딱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가진 것 나누지 못해 늘 아쉽기만 하다.
문학은 아름다운 별빛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정은영은 정지리 생태공원에 가서 두 팔을 한껏 벌리고 있는 억새를 바라본다. 억새가 엄마처럼 "틀려도 괜찮아 / 더듬어도 괜찮아 / 아가야 괜찮다, 괜찮다 / 토닥토닥" 이 세상을 안아주고 있다. 억새가 마치 "실이 되고 / 넌 그것을 꿰어 / 푸른 수액의 바지와 갈색 자켓을 입고 / 하얀 머리를 길러보자"(정지리 생태공원)고 이 세상에 속삭이는 것만 같다.
조형자는 "사랑은 저절로 크는 나무"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는 사랑은 "함께 보듬어 주고 감싸주고 관심을 주고 / 웃음으로 안아" 주는 것이다. "사랑이 작다고 없다고 안 준다고" 말하지 말고 "사랑을 키우지 않았다"고 부끄러워 하라고 말한다. 사랑은 "너와 나 사이"(사랑나무)에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키우지 못했기 때문에 사랑이 없다는 것이다
그밖에 강남율이 쓴 '시와 음악에 관한', 변정윤이 쓴 '이 가을', 신명희가 쓴 '너른고을 문학창작 아카데미 후기', 이복순이 쓴 '신용목 시인과의 첫 만남', 이영자가 쓴 '가을의 마지막 하루', 정인영이 쓴 '함께 한 인연'이란 산문도 솔직하고 새로워서 좋다.
시색 동인들이 펴낸 첫 작품집 <머물거나 날아오르거나>를 읽다 보면 예비 문인이라고 해서 기성 문인이 낸 작품집보다 질이 크게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작품 곳곳에 간혹 군더더기도 있고, 서툰 시어나 아직 덜 삭은 문체도 눈에 띈다. 이는 잔가지를 더 쳐내지 않았고, 반복되는 언어와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게 걱정할 것은 없다. 앞으로 우리 문단을 새롭게 이끌고 갈 이들 예비 문인들이 기성 문인들 작품처럼 매끄럽게 잘 다듬어져 있다면 새로운 작품을 기대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시색 동인들에게 한 마디 던진다면 기성 문인 흉내를 내지 말고 저마다 새로운 제 목소리를 또렷하게 내라는 것이다.
시색 동인들을 가르친 시인 신용목은 "문학은 분명 저 별빛의 아름다운 세계 속에 있는 것도 현실의 굴레 속에 있는 것도 아니라 이 질펀한 현실의 지평 위에서 저 먼 별자리를 보는 것"이라며 "그렇게 우리가 한곳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분명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썼다.
시색 동인지 <머물거나 날아오르거나>
대부분의 작품들이 처음이라는 수줍음을 달고 있다"
시색 동인들이 토론하는 모습
이들은 신경림, 정희성 등 유명 시인들도 초청했다
개강식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송고됐습니다.
이종찬 SBS U포터 http://uporter.sbs.co.kr/lsr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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