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해도 저물어 갑니다. 사소한 것 뿐 아니라 중요한 것도 정말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점점 떨어지는 기억력과 가끔 거울을 볼 때마다 '내 얼굴이 무너져 내리고 있구나.'하는 독백이 흘러나올 때 나이를 먹는다고 느낍니다.
올 한해는 지난해나 지지난해처럼 많은 영화를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그래도 좋은 영화들을 만나 행복했던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그 순간을 다시 한 번 추억하며 제 임의로 베스트 영화들을 뽑아봤습니다.
외국 영화는 금방 뽑았는데 한국영화는 고르기가 어렵더군요.
너무 많아서가 아니라 10개 채우기가 힘들어서 였습니다.
영화에 대한 제 취향도 변해가는 것 같고, 특히 한국영화에 대해서는 그 영화 한편이 세상에 나오기 위해서는 감독과 배우는 물론 많은 관계자들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얼마만큼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순수 관객의 입장에서 욕하거나 극찬하기가 어려워진 것 같습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 싫어 순위는 따로 매기지 않았습니다.(^^)
똥파리
곱게 자란 사람들이라면 관람해내기가 불편할 정도로 강렬한 분노의 에너지가 넘치는 영화입니다.
가족의 인연이라는 것이 참 징글맞다는 생각도 들고요.
감독이자 주연을 맡은 양익준의 연기는 시종일관 부글부글 끓어 넘칠 정도였습니다. 주인공이 그토록 바라던 상황이 한번도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주인공이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희망하던 상황이 죽음 이후에야 실현된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더군요.
불신지옥
뻔 한 기교만 넘치고 아이디어나 이야기의 완결성 없는 공포영화들 때문에 한국 공포영화에 대한 불신이 널리 퍼져있던 상황을 역전시키며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해줄 정도로 잘 만든 공포영화입니다.
이야기의 짜임새도 좋았고 무엇보다 귀신보다 무서운 것이 사람이라는 점에 착안해 효율적인 공포감을 주는 장치들이 좋았습니다.
영화의 가치에 비해 흥행성적은 저조했지만 고 정승혜 대표가 제작한 마지막 영화라서 제겐 더욱 각별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간들의 특징을 잡아내는 홍상수 감독의 예리한 관찰력은 여전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더 여유로워지고 따뜻해졌습니다.
이전 영화들보다 많이 밝아지고 곳곳에 깔려있는 은근한 유머 때문에 킥킥거리며 봤고 보고 나서 다시 곱씹어보며 킬킬거리다 그 찌질함이나 비열함, 엉뚱한 욕망이 내 자신 속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습니다.
이밖에 천재적인 재능과 함께 철저할 정도로 고집스러운 장인정신이 돋보이는 '마더'와 '박쥐'
김윤석이라는 배우의 포스를 느끼게 해준 '거북이 달린다', 한때는 삶의 중심에 있었던 것 같은데 어찌하다보니 흘러간 역사 취급도 못 받는 고민을 끄집어내게 만드는 고통을 준 '파주', 오락영화를 표방하며 할리우드적인 즐거움을 주는 '전우치' 등이 올 한해 함께해서 행복했던 한국영화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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