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미국 간 대화국면이 조성되고 있는 가운데 '그랜드 바겐(Grand Bargain)'이라는 키워드가 북핵 협상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북한이 '비가역적 핵폐기' 조치에 나서면 그와 동시에 안전보장을 약속하고 대대적인 국제지원도 반대급부로 제공한다는 일종의 '빅 딜' 개념이다.
이 같은 구상의 발화점은 이명박 대통령이다. 유엔총회에 참석 중인 이 대통령은 21일(현지시간) 뉴욕에서 열린 미국외교협회(CFR).코리아소사이어티(KS).아시아소사이어티(AS) 공동주최 오찬에 참석, 연설을 통해 "이제 6자회담을 통해 북핵 프로그램의 핵심 부분을 폐기하면서 동시에 북한에게 확실한 안전보장을 제공하고 국제지원을 본격화하는 일괄 타결, 즉 `그랜드 바겐'을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런 일괄타결 구상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 대통령은 지난 6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포괄적 패키지(Comprehensive Package)' 개념을 제시했으며 이를 한 단계 구체화한 것이라는 게 당국자들의 설명이다.
이와 함께 '패키지'라는 어감이 '보상'에 치우친 인상을 주고 있다는 지적에 따라 '서로 주고받는 통 큰 협상'의 의미를 강조하는 쪽으로 표현도 바뀌었다.
이는 미국과의 적극적 교감 하에 나온 산물로 보인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7월말 태국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북한의 핵폐기 대가로 북.미관계 정상화를 포함한 항구적 평화체제 수립, 에너지.경제 지원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더 먼 과거를 돌아보면 1994년 북.미 간 제네바 합의도 일괄타결 방식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양자간 합의가 아닌 6자가 동의하는 방식이라는 점이 다르다.
그랜드 바겐은 더이상 북한의 '살라미(흥정 대상을 여러 조각으로 나눠 야금야금 실속을 챙기는 전법)'식 협상전략에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자성론에 바탕을 두고있다.
지금까지는 협상 프로세스를 여러개로 쪼깬 뒤 각 단계별로 합의와 상응조치를 진행시켰으나 그 결과 북한은 핵 폐기를 뒤로 미룬 채 반대급부만 챙기고 나머지 5자는 시간과 돈만 공중에 날리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지적이다.
청와대 김은혜 대변인 역시 "그랜드 바겐은 단계별 처방과 보상이 되풀이되는 북핵 협상 관행에 대한 근본적 해결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이루어졌다"며 "북핵 문제를 북한 문제라는 큰 틀에서 접근하는 근본적이며 포괄적인 일괄타결을 의미하며 북핵 문제에 대한 이명박 대통령의 근원적 처방"이라고 설명했다.
한 소식통은 "6자회담의 기본원칙인 '행동 대 행동'으로는 북핵의 근본적 해결이 어렵다는 인식이 터잡고 있다"며 "한.미.일.중.러 5자 간에 충분한 의견조율이 이뤄져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이번에는 협상의 시작부터 최종목표인 '비가역적 비핵화'를 상정하고 그에 따른 포괄적 대북지원 청사진을 통째로 제시함으로써 '원 샷'으로 협상을 속전속결 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는 풀이가 나온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현 시점에서, 그것도 다자 외교무대의 한복판에서 '그랜드 바겐'을 화두로 끌어올린 데는 또 다른 배경도 작용하고 있다는 관측이 있다.
무엇보다 북.미 양자대화와 다자협상 재개 국면을 앞두고 우리 정부가 협상의 핵심 어젠다를 선점하고 협상의 이니셔티브를 쥐고 가겠다는 포석이라는 게 소식통들의 분석이다.
여기에는 한국이 한반도 문제의 최대 당사자이자 추후 협상타결시 대북 지원을 주도적으로 해야할 위치에 있다는 상황판단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미국에 핵 협상의 전권을 넘기면서 스스로 외교적 소외를 자초하고 결국 대북 경수로 지원비용의 대부분을 떠안고 말았던 94년 제네바 합의 때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인식과도 맞닿아 있다는 지적이다.
다만 외교가에서는 이 같은 그랜드 바겐이 어느 정도 실효성을 가질지 불투명하다는 시각도 없지 않다.
먼저 협상의 현실상 북한의 호응을 유도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협상의 시작단계부터 최종 목표에 해당하는 '비가역적 핵폐기'를 주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이 '핵프로그램의 핵심부분을 폐기할 경우'라고 규정한 대목은 북한이 보유한 핵무기는 물론이고 플루토늄과 농축 우라늄 등 무기화에 필수적인 핵물질을 '되돌릴 수 없는' 수준으로 먼저 폐기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핵 폐기의 대가로 지급되는 '당근'이 북한에 얼마나 매력적으로 다가설지도 미지수다.
이 대통령이 언급한 내용 중 안전보장 부분은 이미 9.19 공동성명에 포함된데다 북핵 협상의 실질적 키를 쥔 미국이 직접 언급하지 않은 이상 현실적 의미가 크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에 따라 북한이 적극적 핵포기 의지를 보인다면 일괄타결이 가능하지만 북한이 이를 거부하고 나오면 자칫 협상이 시작조차 못 하고 자칫 장기 경색국면을 초래할 수 있다는 시각이 나온다. 이는 현재 대화무드를 보이는 남북관계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에 대해 정부의 한 소식통은 "아직 '시공도면'이 나오지 않은 '개념도' 수준"이라며 "앞으로 북.미간 양자대화와 5자간 조율과정을 거치면서 정교하게 다듬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북핵해법으로 부상한 '그랜드 바겐'
'핵폐기-보상' 일괄타결 모색..北 반응 '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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