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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 산책] 우리는 친구다

김수현의 문화가산책
'우리는 친구다'는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극단 학전이 2004년 처음 선보인 어린이 극이다. 원작은 '막스와 밀리'라는 독일 작품으로, '지하철 1호선'의 극작가 폴커 루드비히와 작곡가 비르거 하이만이 손을 잡고 1978년 발표했다. 한국 공연은 '지하철 1호선' 때와 마찬가지로 극단 학전의 대표인 김민기 씨가 번안과 연출을 맡았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초등학교 3학년인 민호와 유치원생인 슬기(원작의 막스와 밀리) 남매가 놀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뭉치라는 아이와 친구가 되는 과정을 그려냈다. 민호와 슬기, 뭉치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즘 아이들이다. 민호와 슬기는 부모님의 이혼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데, 어머니는 직장을 다니며 아이들을 키우느라 항상 바쁘고 힘들어한다. 민호는 아빠가 떠난 뒤로 겁쟁이가 되어버려, 잠들기 전 여러 차례 엄마를 찾으며 응석을 부린다. 슬기는  하루 종일 텔레비전 앞에만 붙어서 웬만한 선전과 드라마는 좌르륵~ 꿰고 있는 '테레비 짱'이다.

뭉치(본명은 아니고 별명이다. '사고뭉치'라는 뜻이다. 본명도 극 중간에 나오는데, 이 대목이 아주 재미있다)는 아들만 넷인 집의 막내이다. 부모님이 음식점을 운영하느라 바빠서 뭉치는 미술, 태권도, 피아노, 바이올린, 영어, 수학, 전뇌 발달 등등 수많은 학원에 다닌다. 하지만 재미를 붙이지 못해 툭하면 빼먹고 놀이터에 와서 혼자 놀다가 학원 끝날 시간이 되면 집에 돌아간다. 놀이터를 독차지하며 다른 아이들을 못 살게 구는 게 특기라면 특기다.

하지만 '발랑 까진 것처럼 보이는' 테레비 짱 슬기나, 컴퓨터 게임에 열중하는 민호도 계산 없는 순수함, 친구를 생각하고 걱정하는 어린이다운 마음을 갖고 있다. 다른 아이들 겁주기를 즐기는 뭉치도, 알고 보면 속이 여려 겁이 많고 친구들과 놀기 좋아하는 보통 아이다. 그래서 이들은 갈등을 겪으면서도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친구가 된다.

이 작품은 어린이 공연이 흔히 내세우는 '꿈과 환상의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상상 속의 동물도 없고, 요정도, 마녀도, 보물섬도 나오지 않는다. 당연히 화려한 무대장치도, 특수효과도 없다. 작품 속 공간은 민호와 슬기의 방과 놀이터, 이 두 곳뿐이다. 민호와 슬기의 2층 침대가 놀이터의 미끄럼틀로 바뀌고, 소품의 위치가 약간 달라지는 것으로 장면 전환은 끝난다. 단순하지만 충분하다. 암전을 무서워하는 어린이 관객을 고려해, 조명이 약간만 어두워진 상태에서 이뤄지는 장면 전환을 지켜보는 것도 한 재미다.

'뮤지컬'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라이브로 연주되는 음악과 노래의 비중이 아주 크다. '테레비 짱'이나 '위가 좋을까? 아래가 좋을까?' '우리는 친구다' '이불 속은 참 좋아' 등 노래들은 멜로디도, 가사도 모두 흡인력 있다. 몇 차례 반복되는 '테레비 짱' 노래는 관객들도 함께 박수 치며 신나게 따라 하게 된다. 밴드는 무대 왼편 위쪽에 자리잡고 연주하면서 때로는 극의 진행에도 관여한다. 특히 뭉치의 아버지로 나오는 이황의 씨는 연주까지 겸하면서 각종 단역을 해내, 웃음을 자아낸다.

키가 훌쩍 큰 성인배우들이 어린이 역할을 연기하는 게 처음에는 조금 어색하지만, 이 작품에는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장면들이 가득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하는 귀신놀이나 총 싸움도 그렇고, 아이들이 '똥'이니 '방귀'니 하는 배설과 관련된 말을 하며 재미있어 하는 모습도 현실감이 있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온갖 CM송과 유행어를 외워대며 춤추고 노는 '테레비 짱' 슬기의 모습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요즘 어린이들의 생활을 반영한 것일 터이다. 

나는 이 작품을 2004년에도 봤었다. 그 때는 둘째 은형이가 없었고, 이번에는 은우가 4학년, 은형이가 여섯 살이라 작품 속 민호-슬기 남매와 나이대가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의 많은 장면이 정말 새롭게 다가왔다. 동생 슬기 때문에 항상 어른들한테 혼난다고 억울해하는 민호의 모습이, 요즘 자주 은형이와 신경전을 벌이는 은우와 너무나 비슷했다. 나처럼 작품을 두 번째 본 은우는 민호에게 '감정 이입'을 세게 하는 눈치였다.

'테레비 짱' 노래를 따라 부르며 좋아했던 은형이는, 사실 극중 슬기 못지 않은 '테레비 짱'이다. 엄마 아빠한테도 '니들이 고생이 많다' '선배님~' 같은 TV 속 유행어를 남발하고, 하루 종일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는 게 걱정스러워 끄려 하면 결사적으로 On-Off 버튼 사수작전에 나선다. '같이 놀 사람이 없으니까 테레비를 보는 것'이라는 슬기의 항변이 남의 얘기 같지 않았다. 은형이도 아마 마찬가지라고 할 것이다. 엄마 아빠는 늘 바쁘고, 언니는 놀아주지 않잖아!

이 작품에는 (경비 아저씨나, 지나가는 노인 같은 아주 잠깐 나오는 조역을 제외하면) 어른은 단 두 명 등장한다. 뭉치의 아빠와 민호-슬기의 엄마다. 모든 부모들은 이들과 조금씩 닮았다.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사는 게 정신 없이 바쁘고, 아이들이 뭘 원하는지 잘 모른다. 뭉치의 아빠는 아이들을 엄하게 키우는 게 최상의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민호-슬기의 엄마는 '합리적인 엄마'가 되려고는 하지만, 항상 바쁘고 일에 치여 아이들의 투정을 차근차근 들어줄 여유가 없고,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곧 후회하곤 한다. 민호-슬기의 엄마는 꼭 나 같았다. 그래서 '어른들은 우리 말을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민호의 대사에 은우가 '우리 엄마도 그래!'하고 중얼거릴 때, 나는 속이 제대로 뜨끔했다.

극의 결말에서는 어른들도 아이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이들의 우정을 격려하게 된다. 어른들이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아이들이 진정으로 뭘 원하는지 들으려 한 결과였다. 이들이 함께 부르는 '이불 속은 참 좋아'는 참 따뜻하고 정감 어린 노래였다. 어른들이 그렇게 꽉 막힌 것만은 아니라는 걸, 극을 보는 은우도, 은형이도 알아줬으면 바랐다. 물론 앞으로는 나부터 아이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줘야 할 것이고. 그러고 보면 '우리는 친구다'는 어린이들만을 위한 공연이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주는 공연이었다.

'어른에 대비되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어린이 스스로를 중심에 놓고, 아이들의 시각에서 일상에 자리잡은 고민, 꿈, 소망 그리고 현실을 이야기하는' 어린이 공연. 김민기 씨는 "요즘 어린이들이 학원과 학교를 오가며 주입식 교육에만 노출돼 있고, 지극히 상업적인 문화만 있지, 어린이를 중심에 놓은 문화현상은 적은 것 같아서' 어린이 극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학전의 어린이 무대는 '우리는 친구다'를 시작으로 '고추장 떡볶이' '슈퍼맨처럼-!'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친구다'를 즐겁게 봤으니 다른 공연들도 즐겁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학전' 어린이 무대에 대한 믿음이다. 안 그래도 오늘 은우와 은형이는 공연장에서 산 CD로 '고추장 떡볶이'와 '슈퍼맨처럼-!'의 노래까지, 열심히 예습 중이다.

('우리는 친구다'는 8월 28일까지, 학전 블루 소극장에서 공연된다. 문의 763-8233)

  [편집자주]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식견과 지식으로 심도깊은 문화뉴스를 제공해주는 김수현 기자는 1993년 SBS 공채 3기로 입사한 베테랑 방송기자입니다. 사회부,정치부를 거쳐 문화부 공연담당 기자로 오랫동안 활약했고 영국 연수를 거쳐 지금은 미래부에서 차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다양하고 폭넓은 문화계 인맥과 정보가 어우러진 개인블로그도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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