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40기가 한꺼번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습니다.
많은 언론들이 이 소식을 전하면서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가 인정한 것'이란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맞는 말이긴 한데 상투적이죠...
오늘 우리에게 조선 왕릉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왕릉 주변에 사는 분들은 어릴 때 가끔 소풍갔던 곳으로 기억하실 것이고, 또 어떤 분은 예약제로 운영되는 광릉 수목원에 예약제인지 모르고 갔다 대신 들렀던 곳, 숲이 울창하니까 공원처럼 찾는 곳 등등으로 기억되는 공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번에 취재를 하면서 보니 조선이 500년 넘게 이어져온 왕조인만큼 왕릉은 여러가지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는 공간이더군요.
덕수궁 돌담길이 펼쳐지는 서울 중심부의 아름다운 길, '정동길'의 이름은 본래 그곳에 있다 지금은 북한산 기슭으로 옮겨진 '정릉'에서 유래했습니다.
정릉은 태조의 계비였던 '신덕왕후'의 릉인데요. 신덕왕후는 조선의 건국 과정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있고 세자로 10대 초반의 자기 소생 왕자를 책봉하도록 했을만큼 정치 수완이 뛰어나 태종 '이방원'의 어쩌면 정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태조 5년에 세상을 떠나자 태조 이성계는 도성 안인 지금의 영국대사관 자리에 아내의 릉을 만들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자신도 그곳에 묻히고자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태종은 왕위에 오르자 '왕가의 릉은 도성 10리 밖에 써야 한다'는 법령을 만들고 신덕왕후의 릉을 도성 밖으로 옮겨버립니다.
태종실록에 보면 태종이 신하와 이야기하며 '계모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들어와 어머니가 된 사람인데 신덕왕후가 들어왔을 때 자신의 생모는 살아있었기에 계모로 볼 수 있겠는가, 신덕왕후는 자신에게 조금도 은의가 없다'라고 언급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태종은 신덕왕후를 아예 계모로도 인정을 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태종은 신덕왕후의 릉을 도성에서 멀리 쫓아버리고 싶어했는데 600년이 지난 지금 보면 조선왕조의 어느 릉보다 도성과 가까운 곳에 남아있습니다. 이성계는 신덕왕후 옆에 묻히길 원했지만 결국 아들 때문에 사랑했던 아내의 릉이 강제로 이장되는 것을 지켜봐야했고, 죽어서도 자기 혼자 떨어진 곳에 외로이 잠들어있습니다. 다만 자기가 그리워했던 고향 함흥의 갈대가 봉분에 꽂혀있죠. 그래서 태조의 릉인 건원릉에는 벌초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서오릉에는 '장희빈'과 숙종, '인현왕후' 등 우리가 사극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인물들의 릉이 있는데요. 하나 더 눈길을 끄는게 영조의 비 '정성왕후'의 릉인 홍릉입니다.
여기에 보면 정성왕후가 묻힌 곳 옆에 비교적 널찍한 공간이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영조가 자기가 묻힐 곳으로 자리를 잡은 곳입니다. 하지만, 영조는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에 묻혀 있습니다.
이 자리는 원래 효종의 릉이 있다가 여주로 옮긴 곳인데요. 정조는 영조가 원래 잡아놓은 자리보다 이곳이 풍수가 좋다며 동구릉에 영조의 릉을 잡도록 한 것이죠.
일반인들도 일단 파묘된 자리엔 묘를 쓰지 않는데 왕릉을...
당시로선 정말 큰 사건이었을겁니다.
애증이 얽힌 할아버지와 손자의 관계, 영조에 대한 정조의 마음은 정말 복잡했을 겁니다. 영조의 릉을 보면 정조가 영조에게 마지막으로 복수를 했구나란 생각이 얼핏 듭니다.
이번에 심사를 왔던 유네스코 실사단이 크게 평가했던 것 중 하나가 조선왕릉은 거의 도굴을 당하지 않고 잘 보존됐다는 것인데요.
이는 세조 이후 조성 비용과 백성의 부담을 줄이겠다며 거대한 돌을 이용해 석실을 만들지 않고 석회혼합물인 회격으로 왕릉 내부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요즘으로 따지면 콘크리트인 셈이라 도굴이 거의 불가능했다는 것이죠.
그런데도 확실하게 도굴을 당한 릉이 있습니다. 강남에 있는 '정릉'인데요.
임진왜란을 전후해 일본인들이 도굴하고 그걸로도 모자라 왕의 시신도 태워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40기의 왕릉 가운데 유네스코 실사단이 가장 높게 평가한 곳은 저 멀리 강원도 영월에 있는 비운의 임금 '단종'의 릉인 '장릉'이었다고 합니다.
12살의 나이에 왕이 됐다가 17살에 삼촌에 의해 죽임을 당한 비운의 임금 단종.
단종의 시신을 매장하는 자는 삼족을 멸하겠다는 서슬푸른 임금의 명령에도 몰래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암매장했고, 240년이 지나서야 복위된 릉.
자연을 그대로 이용한 릉은 이런 '이야기'와 어우러지면서 유네스코 실사단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는 것이죠.
이렇게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는 조선 왕릉은 아직도 전통에 맞게 제례가 이뤄지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이번에 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왕가의 생활 공간인 궁(창덕궁 문화유산 등재), 왕가의 제례 공간인 종묘 등과 어우러지면 조선 왕가의 생활상을 이해할 수 있는 콘텐츠를 개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잡은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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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보도국 문화부의 젊은 피, 유재규 기자는 종교계와 대중문화, 문화재 분야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2005년 SBS에 공채로 입사한 뒤 국제부를 거쳐 사회2부 사건팀을 거쳤습니다. 따뜻한 시선과 섬세한 시선으로 현장의 이야기들을 전하는 유 기자는 최근엔 박영석 원정대의 에베레스트 남서벽 도전을 현지에서 동행취재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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