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 역사에 강대국을 끌어들여 통일을 시도했던 인물은 신라시대 김춘추와 북한의 김일성 단 2명뿐입니다. 김춘추가 당시에 고구려와 백제를 하나의 민족으로 인식했느냐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습니다. 고 함석헌 선생은 "역사책을 읽다 고구려의 패망 부분이 나오면 그 페이지를 찢어버리고 싶다"며 "한민족은 맏아들을 잃은 셈"이라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만큼 신라의 통일은 불완전한 통일, 외세의 힘을 빌린 통일로 불리며 평가절하 됐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통일신라의 의미를 낮게 평가한다 해도 결과만 놓고 보면 김춘추는 통일에 성공했고 김일성은 실패했습니다.
제가 김춘추와 김일성을 언급하는 것은 이제는 기억에서 점차 잊혀지고 있는 한국전쟁의 기원에 다시 생각해보고 싶어서였습니다. 1950년 6월25일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은 그 이름부터 다양합니다. 남한에서는 '6.25 사변'으로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으로 불렀습니다. 중국에서는 미국에 저항하고 조선을 돕는다는 뜻의 '항미원조전쟁'으로 명명했고 미국을 비롯한 외국에서는 '한국전쟁'이란 용어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우리 학계에서도 '6.25 사변'보다는 '한국전쟁'이라고 부른 지가 꽤 오래됐습니다.
저는 초중고를 다니면서 "한국전쟁은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이 일으켰다"고 배웠습니다. 이른바 '전통주의적 시각'입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할 무렵 미국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지은 <한국전쟁의 기원>이란 유명한 책을 읽고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몇 년 전 러시아 외무성이 비밀 해제한 옛 소련 외교문서가 공개되면서 커밍스의 이른바 '수정주의적' 시각은 설득력을 상당 부분 잃었습니다. 커밍스 자신도 일부 오류를 인정했습니다. 저는 이때부터 한국전쟁이 발발한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물론 미국과 옛 소련, 그리고 중국 측의 자료를 보면 한 가지 사건을 놓고도 주장은 많이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포함돼 있는 '팩트'도 상당수 있습니다. 이런 '팩트'를 종합적으로 분석하면 한국전쟁의 기원은 다음처럼 재구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48년 9월9일 조선민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세운 36세 청년 김일성은 자신만만했습니다. 건국의 기초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1949년 3월 김일성은 남조선을 침략해 통일국가를 만들겠다는 야심을 굳힙니다. 같은 시기 모택동이 이끄는 중공군은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남경 함락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중국 공산당의 승리가 가시화되자 김일성은 더욱 고무됐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모스크바로 갑니다. 크렘린궁서 전쟁계획을 밝히고 스탈린의 협조를 부탁합니다. 하지만 스탈린의 대답은 'NO' 이었습니다. 스탈린은 아직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대답했지만 내심으로는 미국과 갈등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스탈린으로부터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한 김일성은 한 달 뒤 특사를 베이징에 파견합니다. 모택동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남조선 공격은 지지하지만 중국 통일 때까지 기다려라. 1950년 상반기가 전쟁의 적기라 생각한다."
김일성은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기다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1949년 10월1일.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 건립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그리고 김일성에게 뜻하지 않은 낭보가 날아들었습니다. 1950년 1월12일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은 미국의 극동방위선인 이른바 '애치슨 라인'을 발표했습니다. 핵심 내용은 미국의 방위선에 한국이 제외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김일성은 결정적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습니다. 1주일 뒤인 1월19일 평양주재 소련대사인 쉬티코프를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탈린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싶다. 불가능하다면 모택동에게 가겠다." 소련이 전쟁을 도와주지 않으면 모택동에게 협조를 요청하겠다는 김일성 특유의 '줄타기 외교술'이었습니다. 이른바 '마오 카드'를 제시한 것입니다.
김일성이 모택동의 '부하'가 될 것을 우려한 스탈린은 1월30일 쉬티코프에게 전보를 보냅니다. "전쟁을 도와주겠다. 단 모택동에게 이 사실을 지금 말하지는 말라." 스탈린이 한국전쟁 지원을 다짐한 첫 번째 약속은 이렇게 이뤄졌습니다. 득의양양해진 김일성은 같은 해 3월말 스탈린을 직접 만납니다.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전쟁을 할 만큼 바뀌었다"고 말했습니다. 스탈린은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해도 중국이 엄청나게 많은 병사를 내세워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또 한국전쟁이 소련이 자랑하는 전투기인 미그기의 성능도 실험할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전쟁이 5-6년 정도 가면 미군 사상자가 수십만명에 이를 것이고 이렇게 되면 미국 국내 여론이 바뀌어 스스로 물러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김일성은 4월25일까지 모스크바에 머물며 전쟁의 구체적 계획을 소련 정부와 논의했습니다.
평양으로 돌아온 김일성은 전 인민군에 전쟁 준비를 지시한 뒤 5월13일 베이징으로 가 모택동에게 전쟁을 통보했습니다. 이틀 뒤 모택동은 "미국이 참전한다면 도와주겠다."며 OK 사인을 내렸습니다. 하루 뒤인 5월16일 마침내 스탈린의 최종 승인이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스탈린은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두고 남북한을 지배한 것을 고려한 듯 소련군대의 직접적인 파견은 어렵다는 점을 시사했습니다. 즉 무기는 소련이 지원할 테니 병사는 중국이 파견한다는 합의가 이뤄졌습니다. 중국에서는 한국전쟁에 대해 수뇌부가 대부분 반대했습니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대부 주덕과 한국전쟁시 총사령관으로 파견됐던 팽덕회, 그리고 '인해전술'로 숱한 미군을 희생시킨 임표 등이 미국의 중국 주요도시 폭격 가능성을 들어 전쟁개입을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모택동은 중국으로 전쟁이 확전되지 않을 것이고 확전된다고 해도 소련 공군력으로 싸움이 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또 핵전쟁은 국제 여론상 불가능하다며 군수뇌부를 설득했습니다. 주은래 총리만 가타부타 의견을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택동은 나중에 "조선 전쟁 개입은 1.5인의 찬성으로 성립됐다"고 회고했습니다. 1인은 모택동 자신, 그리고 0.5인은 주은래를 말합니다.
5월16일 전쟁이 최종 결정되자 김일성은 모든 군대와 물자를 38선으로 집결시켰습니다. 5월23일 미 공군첩보대와 육군성은 정보 보고를 통해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말했지만 미국 정부는 이를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6.25일 새벽 전쟁은 시작됐고 우리 민족은 수백만 명이 죽는 5천년 역사상 최대 비극을 겪어야 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도 반세기가 훨씬 넘었습니다. 북한은 이제 더 이상 러시아와 중국의 협조를 기대하지도 않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체사상과 사회주의 강성대국 구호로 무장한 그들에게는 이제 '핵무기'란 가장 위험하고도 가장 강력한 수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59년전 김일성이 주도한 통일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아버지의 오판을 아들이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실패에서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국제사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것이 현시점에서 한민족을 공멸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는 가장 중요하고 확실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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