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변호사에서 청문회 스타, 그리고 대통령까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인생은 끝없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굴곡 많았던 정치 역정을 되돌아봤다.
지난 1988년 말 국회 5공비리 청문회장. 초선의원에 불과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연한 논리와 거침없는 언변으로 이른바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이창동 전 문화부장관은 "(당시)밤을 새워 하루종일 TV앞에서 지켜보다 혼잣말이 나왔다"며 "바로 저런 사람이 대통령이되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인권변호사 노무현이 정계에 입문하게 된 것은 정신적 스승으로 알려진 송기인 신부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의 정면승부 성향은 5공 실세 허삼수 후보와의 첫 선거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1990년 이뤄진 삼당합당, 노 전 대통령은 이를 두고 지역주의와 철세 정치 전형이라며 정치적 보스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도 결별을 선언한다. 그는 1992년, 1995년 부산 지역 야당후보로 출마했지만 잇달아 낙선했다. 그러나 1998년 정치 1번지라는 서울 종로에서 당선돼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다.
하지만 여기서 안주하지 않은 그는 2000년 종로지역구 버리고 부산지역으로 향했다. 그러나 또다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선거가 끝난 2달 뒤 원칙의 정치인 노무현을 지지하겠다는 30-40대 네티즌이 중심이 돼, 최초 정치인 팬클럽인 '노사모'가 결성한다.
노무현의 정치 행보가 사람들 마음 움직였고 2002년 그는 이인제 후보 꺽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정된다.
2002년 민주당 연일 참패하던 당시 농민대회 참석했다 수모를 겪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승부사적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선거 패패 책임 묻는 당내 목소리 높아지자 재경선을 내세우며 정면돌파 시도한 것.
그는 TV토론과 여론조사 결과로 단일후보 결정하자며 또한번 도박 감행한다. 이어 정몽준 후보를 누르고 야권후보 단일화에 합의하며 대선 승리의 돌파구를 마련한다.
오기와 뚝심으로 뭉쳐진 집념이 발휘됐고, 노사모는 노풍을 일으킨 기폭제 역할을 했다. 정치에 무관심 하던 젊은층이 참여했고, 개미 후원금이 67억원을 넘어섰다. 선거혁명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의 감성 정치는 표심 움직이는데 한 몫했고, 대통령 선거 전날 정몽준 후보가 후보단일화 철회하는 아찔한 순간이 있었지만 끝내 승리했다.
(SBS인터넷뉴스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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