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 영국의 한 민가에서 '홈 스테이'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노부부가 다소 '황당한' 주문을 하더군요. 샤워를 할 때엔 꼭 욕조의 커튼을 치고 샤워가 끝나면 바닥 등의 물기를 깨끗하게 닦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욕실에 물 빠져나가는 구멍이 없긴 했지만 한국인인 전 당황스럽기도 했죠.
그런데 몇달 뒤 아버님 친구분이 샤워를 하다 욕실에서 미끄러져 돌아가셨단 얘기를 듣고는 바닥 물기를 닦는 것도 나름 '이유'가 있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실제 우리나라에서도 욕실에서 미끄러지는 사고가 점점 늘고 있습니다. 한국 소비자원에 접수된 욕실 미끄럼 사고는 2006년 217건, 2007년 343건, 2008년 646건, 올 2월까지 벌써 124건이나 됩니다. 사고의 62%가 10살 이하 어린이와 환갑 넘은 노인층이 대상입니다.
직접 취재를 갔던 서울 마포의 이씨 할머니도 욕실로 청소하러 들어섰다가 그대로 미끄러져서 왼쪽 엉치뼈가 부러지는 바람에 장애판정까지 받은 경우였습니다.
소비자원에서 미끄럼 실험도 직접 해봤는데요. 타일 위에 물을 뿌려놓고 특수고무판을 내려놓고 그 위에 4.5kg짜리 쇳덩어리를 올려놓습니다. 영국에서 제작됐다는 마찰력 측정기계를 고무판와 연결해 살살 끌어보면 기계에 마찰력 수치가 뜨는데요. 일반 타일과 미끄럼 방지처리를 한 타일을 동시에 실험해 봤는데, 일반 타일의 마찰력이 훨씬 작았습니다. 당연한 결과겠죠.
그럼, 시공때부터 아예 마찰력이 큰 미끄럼 방지 타일을 깔면 되지 않느냐라는 의문이 들텐데요.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어느 규정을 찾아봐도 이런 조항이 없습니다.
'품질경영 및 공산품 안전관리법' 에 '자율안전확인 대상 공산품'이 있는데 여기엔 관련 기준이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율'이기 때문에 안 해도 그만이죠. 건설업체에서 단가가 비싼 미끄럼 방지처리 타일을 쓰는 대신 일반 타일을 쓰겠죠. 이러다보니, 소비자원이 서울과 수도권의 15개 아파트 욕실을 조사한 결과 13곳 욕실이 '자율 기준'보다 훨씬 미끄러운 타일로 깔려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나마 좀 덜 미끄러운 바닥 아파트는 한 곳은 최근 입주한 아파트이고 다른 한 곳은 아직 입주하지 않은 진짜 새 아파트 입니다.
소비자원은 크게 두가지 건의를 할 거라고 합니다. 국토부가 아예 미끄럼 방지 타일 시공을 의무화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기술표준원이 KS 규격에 미끄럼 관련 규정을 추가해 주면 어느 정도 좋아질 거란 거죠.
이 글을 읽고 당장 집 욕실 바닥을 쳐다보면 부모님, 아이들 걱정이 앞설 겁니다. 오히려 욕실 슬리퍼가 더 미끄러울 수도 있죠. 좀 지저분하기도 하고 보긴 싫더라도 바닥에 붙이는 미끄럼 방지 스티커라도 사 보는게 어떨까 싶네요.
|
|
[편집자주] 경제부 산업팀에서 활약 중인 홍순준 기자는 삼성.LG등 전자업계와 공정위, 소비자원을 출입하고 있는 고참 기자입니다. 1995년 입사 후에는 사회부, 정치부 기자로 잔뼈가 굵었고 사건팀의 리더인 '시경 캡'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특유의 돌파력과 폭넓은 취재로 보내오는 기업 내면의 깊은 이야기들이 기대됩니다. |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