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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레슬러 - 처연한 결단

더 레슬러(감독: 데런 애로노프스키, 주연: 미키 루크, 마리사 토메이, 청소년 관람불가)

(*뻔 한 결말이지만 스포일러성 글이 포함되어 있으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지난해 이 영화가 베니스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영화의 주인공이 미키 루크 라는 얘기를 듣고 놀랐습니다. '권위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영화제의 수준은 이렇거든!'하고 자랑하려는 것처럼 까다롭거나 어려운 영화의 손을 들어주는 일이 흔하던 영화제가 얼핏 보면 [챔프]나 [록키] 시리즈 같은 스포츠 신파 영화로 보이는 할리우드 영화의 손을 들어주었다고 해서 의외라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관객 울려보겠다는 순수한(?) 의도로 만들어진 '스포츠 신파' 영화만은 아니더군요.

80년대 프로레슬링 전성기를 주름잡았던 왕년의 스타 랜디 '더 램'(미키 루크), 20년이 지난 이제는 퇴물 레슬러로 후배들의 존경은 받지만 자그만 무대에서 가끔씩 경기를 하며 돈을 법니다. 그 돈만으로는 모자라 마트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해야 하고 그동안 벌어놓은 돈은 다 탕진해버려 좁은 트레일러 주택에 사는데 월세도 밀리기 일쑤입니다.

흥분제, 진통제, 마약 등 각종 약에 의지하며 링에 오르다가 결국 어느 날 심장 마비에 걸려 죽다 살아나죠. 절대 경기는 안 된다는 의사의 경고에 은퇴를 결심하고, 평소 마음을 두고 있던 스트립 댄서 캐시디(마리사 토메이)에게 의지하려 하지만 잘 안 풀리고 어엿한 숙녀가 될 때까지 돌보지 않던 딸과 어색한 화해를 조심스럽게 시도하는데 이마저도 여의치 않습니다.

줄거리를 끝까지 쓰지 않더라도 흐름과 결말이 어떠할지 뻔 한 구조인데, 주인공이 미키 루크이고 주인공의 직업이 권투나 육상 따위가 아닌 프로레슬링이라는 데서 묘한 아우라가 생겨납니다. 젊은 영화팬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미키 루크의 대표작은 킴 베이싱어와 함께 출연한 [나인 하프 위크](1986년) 입니다. 끈적끈적한 분위기가 스크린에서 흘러넘쳐 나와 객석을 흠뻑 적시던 이 영화는 당시 청소년들과 젊은이들 사이에 화제가 됐었고, 때깔 좋은 명품 에로영화의 대표 격인 영화였습니다. 그는 당시에 요즘 F4 부럽지않은 인기를 얻는 섹시 아이콘으로 등극했죠. 그 뒤 행적을 보니 90년대에 권투 선수로 데뷔했지만 신통치 않았고 성형 후유증, 마약 등 각종 스캔들에 오르내리는 처지였다고 하더군요.

'프로 레슬링은 다 짜고 하는 연기이고 진짜로 때리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폭로 아닌 폭로에 대해 영화는 그 세계에도 나름대로 규칙과 시나리오는 있지만 등장인물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위험한 장면에 대역을 쓰지 않고 실제로 맞고 피 흘리기도 한다는 점을 빼면 연기자들의 연기와 흡사한 거죠.

단순한 인간승리나 감동 스토리가 아니라 엉망으로 망가지고 예측할 수 없고, 뜻대로 할 수 없는 현실과 몸은 힘들지만 약속한 대로 진행되고 관중들의 환호성에 마약처럼 취할 수 있는 무대 사이에서 결국 주인공은 결단과 선택을 합니다. 심장을 걱정하며 출전을 만류하는 캐시디에게 "내 심장은 지금 뛰고 있어. 나를 다치게 하는 것은 저 바깥세상(현실)이야."라고 말하며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황천길이 될 수 도 있는 위험한 길을 가는 거죠. 어떤가요. 저는 이 부분에서 용기와 결단, 끊임없는 불굴의 투지가 결국은 어떻게 보면 비겁한 선택이 될 수도 있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인생은 성숙과 노화 단계에 맞춰 업그레이드나 다운그레이드에 실패한 인생이라고 볼 수 있죠, 비슷한 사례를 저와 주변에서 자주 보는 것 같거든요. 다른 일을 하자니 두렵고, 익숙한 세계에서 맛보았던 달콤함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고…….배운 짓이 도둑질이라는 넋두리를 늘어놓으며 자신을 갉아먹는 것…….

'불굴의 투혼'이 뒤집어 보면 '겁쟁이의 회피'로 해석될 수 있는 인간사의 복잡함을 생각하며 필살기를 보여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로프위에 올라가 어렵게 중심을 잡고 결국 몸을 날리는 주인공의 애처로운 몸짓과 행복해 보이는 슬픈 표정의 잔상이 오래 남았습니다.

  [편집자주] '영화를 보는 편안한 시선'  남상석 기자는 2002년부터 영화계를 출입해 온 베테랑 문화 담당 기자입니다.  1993년  공채로 입사해 사회부와 정치부 등을 거쳐 오랜 기간 보도국 문화부에서 내공있는 필력을 과시해 왔습니다. 영화와 영화인들을 좋아하며  '평론가처럼 어렵지 않은.. 관객의 한사람 같은 친근한 눈높이의 영화평'으로 개인 블로그도 큰 반향을 얻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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