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전국경제인연합회 소속 30대 기업은 대졸초임 삭감을 발표했습니다. 23일 노사민정 대타협이 성사된 뒤 이틀만에 전격적으로 단행됐죠. 노사민정 대타협 과정을 쭉 지켜봤던 기자로서는 재계의 신속한 움직임에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타협안 발표 직전까지, 한국노총과 경총은 '임금삭감'이라는 문구를 합의안에 넣을지 여부를 두고 서로 배수진을 치고 맞서고 있었는데요. 결국 한국노총의 요구에 경총이 양보했고, '삭감'이라는 표현은 '절감'으로 바뀌었습니다.(한국노총의 해석에 따르면 삭감은 기본급을 줄이는 것이고 절감은 각종 부가 수당을 줄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경총의 해석은 달라, 기본급까지 포함한 전반적인 임금을 깎는 것을 절감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불과 이틀전 '삭감은 아니다'라는데 노동계와 합의했던 재계가, 갑자기 '임금삭감', 그것도 대졸초임 삭감을 선언한 것이죠.(물론 노사민정 대타협에서 한국노총에 약속했던 '고용유지'를 전제조건으로 내걸긴 했습니다.)
연 2천6백만 원 이상의 대졸초임부터 차등적으로 삭감하는데, 최고 28%의 삭감률을 적용하기로 했습니다.
삭감이 필요하다는 근거는 다음의 세 가지입니다.
1)08년 우리나라 100인 이상 기업 대졸초임 2,441만 원
2)우리보다 1인당 GDP가 두배 높은 일본의 08년 대졸초임 2,630만 원
3)07년 1인당 GDP대비 임금수준:일본 72%, 우리나라 128%
(출처: 경총 ...전경련이 발표하고 경총의 자료를 근거로 내세웠습니다.)
'1) 2) 3)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대졸신입 연봉 2천6백만 원 이상은 삭감 대상이다'라고 정한 것이죠.
그런데 계산법이 조금 미심쩍었습니다.
[기자 : 국내 초임이 일본 초임보다 높다는 얘기인줄은 알겠는데, 왜 기준을 2천6백만 원으로 정했죠?]
[전경련 관계자 : 산술적으로 계산한 것은 아니고요. 일본 초임에서 30만 원 뺐습니다.]
아무튼 이런 계산법에 의해, 올해부터 신규 입사하는 대졸사원들은 임금이 깎일 판입니다. 입사때부터 최대 28% 삭감된 연봉으로 시작하다보니, 연차가 쌓여도 누적적으로 예전 선배사원들보다 훨씬 적은 연봉을 받게 되겠죠.
노사민정 대타협에 합의한 한국노총과 대타협 참여를 거부한 민주노총은 즉각 즉각 반발했습니다.
[한국노총 간부 : 재계가 대타협에 약속해놓고 등에다 칼을 꽂은 것입니다. 임금 삭감은 안 된다는 우리의 요구를 무시한 것입니다. 가서 폭탄이라도 던지고 싶은 심정입니다.]
[민주노총 간부 : 어떻게 노동자들이 피를 흘리면서 쟁취한 임금인데, 하루 아침에 이럴 수 있나. 한국노총과 재계의 야합에 노동자들이 모두 거덜나게 생겼다.]
반발은 민노총이 더욱 거셌습니다.
어제는 전경련의 임금삭감 근거가 날조된 거짓말이라는 기자회견을 가졌죠.
요지는 이렇습니다.
가) 전경련은 한국의 대졸초임과 일본의 대졸초임을 비교함에 있어서 한국은 총임금(기본급+제수당+고정상여금), 일본은 총임금이 아닌 정액급여(기본급+제수당)로 비교했다. 일본 대졸초임을 총임금으로 따지면 한국에 비해 훨씬 높다.
나) 또 최근 환율이 올라 한국과 일본의 임금격차가 훨씬 커졌는데도 이를 무시했다.
다) 전경련은 GDP대비 임금수준을 근거로 한국 대졸초임이 국가 소득수준보다 높다라고 주장했지만 중국은 213%로 훨씬 더 높다. 게다가 일본같은 선진국은 직접 임금 말고도 사회보장제도를 통한 간접임금의 비중이 높다.
따라서 '수치를 왜곡해 노동자의 임금을 깎으려는 얄팍한 사기'라는게 민노총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지적이 맞는 것일까요?
전경련의 한 고위 간부는 일단 일부를 시인하더군요.
[전경련 간부 : 한국은 총임금, 일본은 정액급여로 비교한 게 맞다. 하지만 왜곡한 자료는 아니다. 한국은 고정상여금이 월급개념으로 나오는 것이고 일본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고정급' 개념으로 비교한 자료다.]
해명성 주장도 덧붙였습니다.
[전경련 간부 : 이게 '잘사는 일본에 비해 한국 초임이 높다'라는게 요점인데, 자꾸 물고늘어지면 안된다. 또 GDP 대비 임금수준 비교가 국가별 차이를 무시했다고 하는데 GDP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아닌가.]
일단은 명료한 답변은 아니었지만, '자료 근거의 결점은 일부 시인하지만 그렇다고 큰 취지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정도로 해석되더군요.
하지만 올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신입사원들이, 두루뭉실하게 주먹구구식으로 정한 기준에 의해 봉급이 깎인다고 생각하니, 쉽게 용인될 성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기업의 형편이 어려워지면, 소속 근로자라고 견뎌낼 재간이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무조건 '임금삭감'이나 '동결'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민주노총의 태도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기업도 '해고'와 '임금삭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인도적 차원에서 후자를 권하겠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무조건 반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겠죠.
하지만, 노동자의 희생과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보다 과학적이고 치밀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고용유지'에 대한 약속도 구체적인 수치제시 등의 노력이 있어야겠죠. 노동자의 자발적인 참여가 없는 반강제적인 '일자리 나누기', 주먹구구식의 '일자리 나누기'는 자칫 경제위기 극복은 커녕 첨예한 노사갈등만 불러올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일자리 나누기'는 노사의 고통분담과 서로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는 만큼, 재계도 태도를 바꿔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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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김형주 기자는 현재 경제부에서 노동부를 출입하고 있습니다. 2004년 공채로 입사한 김기자는 이전에는 사회2부 사건팀에서 활약했습니다. 훤칠한 키에 핸섬한 외모로 인기가 많은 그는 취재현장에서 만난 인간 군상들과 사회 부조리 등 보고 느낀 많은 것들을 담은 개인 블로그도 운영 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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