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는 임진왜란때(선조25년, 1592년) 일본을 통해 국내에 들여왔다는 게 현재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실린 정설이다. 그런데 한국식품연구원 권대영 박사팀이 오늘 "고추는 그 이전부터 국내에서 식용으로 쓰여왔다"며 고대 문헌을 증거자료로 제시해 논란이 일고 있다.
권 박사는 임란 발발 100여년 전 문헌인 구급간이방(救急簡易方, 성종 18년 1487년)과 훈몽자회(訓蒙字會, 중종22년 1527년)에 초(椒)라는 한자와 함께 그 밑에 '고쵸'라는 한글이 병기된 것을 그 증거로 제시한다. 또 그 이전인 향약집성방(響藥集成方, 1433)과 식료찬요(食療纂要, 1460)에도 초장(椒醬)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것이 고추장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권 박사는 그러면서 중국 문헌인 식의심감(食醫心鑑, 당선종4년 850년)에도 초장(椒醬)이라는 표현이 있기 때문에, "고추는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한 이후 중앙아메리카에서 유럽을 통해 아시아로 넘어왔다"라는 기존의 학설도 수정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권 박사는 "생물학적으로 봤을 때 중앙아메리카와 일본을 통한 국내에 고추가 전래됐다는 것에 의문을 갖고 15년 전부터 이 문제를 연구해왔다"면서 "인류학회나 식문화학회에 토론을 제안했으며 6월쯤 일정을 잡도록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이에대해 고추의 일본전래설을 주장하는 한국학 중앙연구원 주영하 박사는 반박할 가치도 없는 억측이라는 입장이다.
먼저 이수광의 지봉유설(1614년)을 보면, 지금의 고추를 일본에서 들여온 倭介子로 지칭하면서 "너무 매운맛 때문에 사람들이 소주에 타 마시다 죽었다"는 기술이 있고, 이규경(실학자 이덕무의 손자) 오주연문장전상고(19세기 후반)에도 "임란이후 일본을 통해 고추가 전래됐다"는 기술이 있다는 것이다. 또 초장(椒醬)을 고추장으로 봐야 한다는 권박사의 주장에 대해서도 허균의 동의보감을 보면 '초장(椒醬)은 중국 촉나라에서 나는 천초(산초)로 만든 장'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만큼 초장을 고추장으로만 보는 것은 틀리다는 것이다.
주박사는 특히 권 박사팀이 주장하는 구급간이방과 훈몽자회에 나오는 고쵸는 지금의 고추가 아니라 '쓴맛이 나는 초(산초,후추 등)'를 우리말로 표현한 것일 뿐이고, 고추의 원산지로 중앙아메리카외 중국,인도가 포함될 수 있는 고대 자료이 있긴 하지만 모두 불명확하며, 오히려 중앙아메리카 전래설을 뒷받침하는 문헌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주장한다.
고추가 일본에서 넘어오지 않고 그 전부터 국내에 있었다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한가한 논쟁이라고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한국의 대표음식인 김치와 고추장의 핵심인 고추가 일본에서 넘어왔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김치,고추장 종주국으로서 인정을 받는데 장애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김치가 이제는 세계적인 음식이 됐음에도 세계 지적재산권 협의기구(WIPO)를 통해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 역사가 일제시대때 너무도 많이 왜곡돼 왔다는 사실에 비쳐볼 때, 혹시 고추의 역사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왜곡된 것은 아닌지 권대영 박사팀의 외로운 싸움에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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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사회 1부에서 농림수산식품부를 출입하고 있는 권태훈 기자는 1994년 SBS에 입사해 사회, 정치 분야 등에서 폭넓은 시각의 기사들을 써왔습니다. 사건팀 기자 시절에는 서울대 교수직을 둘러싼 금품수수 관행을 정면 고발하는 특종기사로 대학가와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도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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