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와 실물경기 침체가 가속하는 가운데 한국은행법 개정 논의가 금융권과 정치권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논의의 핵심은 금융위기를 잠재우고 실물경제 악화를 막기 위해 한은이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은법에 근거 조항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기부양을 하려면 한은의 발권력 동원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지금처럼 한은의 설립 목적이 `물가안정'에 국한돼 있으면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다.
이러한 `한은의 역할론'에 대해서는 정부나 정치권에서 큰 이견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견해차가 커 실제 한은법 개정이 이뤄지기까지는 난항이 예상된다.
◇ 한은 "금융회사 검사권 있어야"
9일 정부와 정치권에 따르면 한은법 개정 논의가 나오는 이유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한은이 기준금리를 작년 9월 5.25%에서 지난달 2.50%로 낮추고, 원화와 외화 등 총 60조 원에 가까운 유동성을 공급했는데도 시중의 `돈맥 경화' 현상이 개선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와 정치권은 한은이 미국이나 유럽의 중앙은행들처럼 더욱 과감하게 돈을 풀기를 바라고 있지만 `물가안정'을 최우선으로 하는 한은은 훗날 인플레이션의 부작용을 감안해 조심스럽다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운신의 폭을 넓히기 위해 ▲한은법 제1조의 설립 목적에 물가안정 외에 `금융안정' 기능을 추가하고 ▲금융회사에 대한 직접 검사권을 부여해달라는 것이 한은의 요구다.
이성태 총재는 지난달 30일 열린 서울 이코노미스트 클럽 조찬 강연 원고에서 "금융안정은 물가안정과 함께 중앙은행의 핵심 과제"라고 강조했다.
물론 한은은 지금도 발권력을 동원해 금융안정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은행 등 금융회사에 대한 직접 검사권이 없어 금융안정 기능 수행에 제약을 받고 있다는 것이 한은의 주장이다. 한은 관계자는 9일 "검사권 없이 금융시장 안정만 수행하라는 것은 한은에 무조건 돈만 풀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이 총재도 평소 "금융기관의 위기가 발생하면 최종대부자로서 자금을 지원해야 하는 중앙은행이 평소 금융기관의 건전성 여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혀왔다.
한은은 1997년 말 한은법 6차 개정 당시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을 한은 총재로 바꾸면서 금융감독의 핵심 기능을 금융감독위원회에 대부분 넘겼다.
한은 관계자는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등 대부분 선진국의 중앙은행이 금융기관에 대한 감독, 검사권을 보유하고 있다"며 "은행에 대해서는 단독 검사권을, 저축은행 등 2금융권의 경우 자료 제출 권한이라도 부여해야 한은이 선제적이고 빠른 판단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정부.금감원은 `시큰둥'
정부는 한은의 역할론을 강조하면서도 한은법 개정에는 미온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금융회사 검사권을 가진 금융감독원은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한은법 개정과 관련해 정부는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단계"라며 "다만 법 개정이 되지 않더라도 한은이 금융시장 안정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한국금융연구원은 지난해 11월 재정부가 의뢰한 용역 보고서에서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목표에 물가 안정이라는 단일 목표 외에 금융 안정이라는 새로운 목표도 추가하는 방향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다"는 입장을 제시한 바 있다.
금융감독원은 한은법 개정 논의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과거 한국은행에 속해 있던 은행감독원을 비롯해 보험감독원, 증권감독원 등을 통합한 민간 감독기관이 출범한 지 10년이 지났는데 한은에 다시 검사권을 부여한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금융기관들 입장에서는 시어머니가 한 명 더 생기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도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으로 금융감독 기능이 분리돼 비효율적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상황에서 한국은행까지 감독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시장의 혼란만 키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야 정치권도 한은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민주당은 한은의 금융기관 감독권을 부분적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자료 요구권을 부여하고,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통화정책을 집행할 수 있도록 한은 총재의 임기를 6년으로 보장하되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치도록 하자는 입장이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자료요구권을 부여하면 금융감독원 외에 또 다른 감독기관이 생겨 시장에서 상당한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며 부정적 입장을 나타냈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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