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분다. 아주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분다. 바람 속에 칼이 숨겨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바람 속에 매서움이 실렸다는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고, 또 등을 돌린다. 고개를 숙이고, 옷깃을 여미고, 또 등을 돌릴지언정,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바람에 쓸려갈 잎사귀도 더 이상은 없다. 마지막 한 잎까지 떨쳐 내버린 은행나무만 우뚝 서 있을 뿐. 바람은 거침없이 몰아친다. 이제, 그 차가운 바람을 제 몸뚱이만으로 맞을 수밖에. 걸음은, 그래서 멈출 수 없다. 다만 뚫고 갈 뿐. 마로니에 공원은 지금, 겨울이다.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우중충한 공원, 마로니에 공원은 마치 관객이 떠난 객석처럼 휑하다. 텅 빈 벤치, 차디 찬 시멘트 바닥, 냉기 서린 철제 울타리, 그리고, 그 너머에 마로니에 나무가 우두커니 서 있다. 손바닥만 하던 잎사귀는 다 어디로 갔을까? 잎사귀 없는 나무는, 은행나무나 마로니에 나무나, 다 나무일 뿐. 하지만 나는 안다. 둥근 철책 너머 손바닥만한 큰 잎사귀를 드리우며 서 있었던 나무의 여름을, 지금은 비록 그 큰 잎사귀를 다 떨어뜨린 채 몸뚱이만 있지만 마로니에 나무라는 것을. 그리고 나무의 지난 날을...............
마로니에 공원은 이 마로니에 나무 때문이고, 마로니에 나무 덕분이다. 마로니에 나무 때문에 마로니에 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마로니에 나무 덕분에 낭만의 향기를 더 했다.
[음악이 서서히 들려온다.........]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노래: 박건>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눈물 속에 봄비가 흘러내리듯
임자 잃은 술잔에 어리는 그 얼굴
아~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 버렸네
그 길에 마로니에 잎이 지던 날
루 루루루 루루루 루루루 루루루루루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듯이
덧없이 사라진 다정한 그 목소리
아~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 버렸네
그 길에 마로니에 잎이 지던 날
루 루루루 루루루 루루루 루루루루루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서서히 음악소리가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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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조선은 일제 치하의 암흑기였다. 일제는 1919년 3.1운동 이후 식민 통치의 방법을 바꿨다. 경찰에 의한 무단통치 대신 문화 통치를 실시했다. 쉽게 말해 폭력적으로 억압해 봤더니 오히려 반발이 더 심해지자 대신 어르고 달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는 지식인들은 이를 이용해 민립대학을 세우고자 했다. 독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재들을 길러내는 교육이 절실하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일제는 그것을 가만 보고만 있지 않았다. 민립대학설립운동을 막고 대신 관립대학을 세웠다. 경성제국대학.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은 그렇게 해서 세워졌다.
일제는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할 장소로 동숭동을 선택했다. 동숭동은 원래 조선시대 숭교방이라고 불렸는데, 일제 시대 때 동쪽의 숭교방이란 의미인 동숭동으로 바뀌었다. 당시 동숭동에는 이미 공업전습소(현 방송대 별관)와 대한의원(현 서울대학병원), 부속의학교(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등 교육시설들이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일제는 이른바 교육 지역에 자연스레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필연이었을지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동숭동 즉 옛 숭교방(崇敎坊) 지역은 일찍이 조선시대부터 학문의 터였기 때문이다.
조선 건국 초기, 태조 이성계는 지금의 국립대학격인 성균관을 설치했다. 그리고 지금의 명륜동 혜화동 등 성균관 주변 일대를 '가르침을 높이 여긴다'라는 뜻으로 숭교방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6백 년 동안 성균관 일대는 학문하는 젊은 유생들의 지역이었다.
조선 시대 서울은 크게 세도 있는 양반들이 거주하는 북촌(지금의 사직동 옥인동 등 일대), 가난한 양반과 하급 벼슬아치들이 거주하는 남촌(지금의 남산 기슭 일대), 그리고 상인들과 중인들이 거주하는 중촌(지금의 종로구 일대)으로 나뉘어졌다. 대학로는 옛 조선시대로 치면 중촌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또 서울 6백년사를 보면 이 일대에는 천민인 백정과 갖바치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학문을 하는 젊은 유생들이 있었고, 소, 돼지를 잡는 백정들이 있고, 그 가죽을 재료로 신발을 만드는 갖바치도 있었다, 또 근처 사직동 인근에는 악기를 만드는 악인들이 거주했다. 그들 역시 소가죽을 이용해 장구나 북을 만들었을 것이다. 여기에 물론 술집이 빠질 수 없다. 나는 상상해 본다. 젊은 유생들이 주막에서 술을 마시며 시국을 논하며 비분강개하는 모습을. 그리고 가장 천대받는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백성들을 위한 나라를 만들겠다며 서로 열띤 이상론을 펼치는 모습을. 때마침 어디선가 북장단과 장구 가락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을까.
# 주막
[멀리서 장구 소리가 들린다]
때는 1616년 광해군 8년, 임진왜란의 후유증으로 조선은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혼란의 시기, 탐관오리들은 온갖 구실로 주린 백성들의 배를 더 쥐어짰고 조종은 실세인 이이첨에 의해 농단되고 있었다. 거리에는 땅이 꺼질듯 한 백성들의 한 숨 소리만 가득했다.
유 생 : 이보게 고산, 들었는가? (고산: 윤선도의 호)
윤선도 : 뭘 말인가?
유 생 : 글쎄 요즘 고관대작들이 밤마다 잠을 자지 못하고 있다는 것 아닌가?
윤선도 : 아니, 권력도 잡았겠다, 임금도 무시하고 자기들 맘대로 좌지우지 국정을 농단하고 맘에 안 들면 귀양 보내고 사약을 내리고, 자기네들 맘대로인 세상인데 뭐가 부족 해서 잠을 못 잔단 말인가?
유 생 : 아니 그게 아니고 도적들이 밤마다 고관대작들의 집을 차례로 털고 있다는 걸세. 그것도 못된 고관들의 집만 골라서 털고서는 일부러 징표로 놓고 가는데, 그것 때문에 고관대작들이 초비상이라는 걸세
윤선도 : 거 참 잘 됐구만, 그 놈들 재산이 근데 도적 좀 맞았다고 어디 표라도 나겠나.
유 생 : 아, 이 사람아. 단순한 도적이 아니라는 걸세. 도적이 훔친 재물을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게다가 이번에는 실세인 이이첨의 집을 모월 모일 털겠다고 도적이 공표를 했다는 걸세. 그렇잖아도 민심이 흉흉한데, 이 도적이 탐관들만 골라 도적질을 해서 재물을 나눠주는데다, 그 수장인 이이첨의 횡포를 밝히고 그 재물을 털겠다고 하니까 민심이 동요하고 있다는 것 걸세. 그래서 요즘 도성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 모르는가?
윤선도 : 사필귀정일세. 권력을 잡기위해서 그들이 무슨 짓을 했는가? 아무리 계모지만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이복 동생을 귀향 보내고 또 얼마나 많은 반대파 사람들을 죽였는가? 사필귀정일세 사필귀정.
유 생 : 아이고 고산, 이 사람아, 자네가 지금 올리려고 작정하고 있는 상소를 올리면 안된다는 말일세 내 말은.내 말 뜻을 그렇게도 모르겠나.
윤선도 : 아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내 상소를 올리면 안되다니?
유 생 : 지금 이이첨이 그 도적을 역도로 몰고 있다네. 역도. 알아듣겠나? 필시 이 도적의 배후에는 역도 무리가 있고 그 역모의 배후를 찾는데 혈안이 돼 있다는 걸세. 그런데 자네가 지금 이런 마당에 그 상소를 올려보게, 모르긴 몰라도, 아니 모르는게 아니지. 아마 자네는 당장 역도로 몰려서 큰 화를 당할 걸세. 그러니 그 상소는 올리지 말게나. 지금은 때가 아니네.
윤선도 : 때가 아니라니, 지금이 때가 아니면 언제가 때란 말인가? 이이첨의 국정 농단을 그러면 가만히 보고만 있으란 말인가? 나는 그리 배우지 않았네. 지금 임금의 눈은 흐려있네 그것이 다 이이첨 때문인 것을 자네는 모르는가? 정도를 걷지 않는 정치를 바로 잡고 도탄에 빠져있는 백성들의 실상을 알려 임금이 바른 눈과 정신을 갖도록 하는 게 신하된 자들의 도리일세, 난 그 도리를 다 할 걸세.
유 생 : 아니 그걸 누가 모르는가? 알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걸세. 답답하이.
윤선도 : 허허 답답한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구만. 그러니 더더욱 상소를 올려야 된다는 것 아닌가? 다들 이이첨의 횡포를 알고 있으면서 왜 말을 하지 않는단 말인가? 전하께서 진상을 낱낱이 알도록 해야 한단 말일세.
유 생 : 고산, 자네 뿐만 아니라 자네 아버님을 비롯해서 집안에 미칠 화를 생각해 보겠나. 자네의 소신만 생각할 게 아니라, 집안에 미칠 화를 생각해 보란 말이세.
[유생 답답한 마음에 술을 벌컥 벌컥 들이킨다]
[윤선도도 조용히 술 한 잔 마신다]
윤선도 : 내 어찌 그것을 모르겠는가. 자네의 마음도 다 아네. 그러나 난 선비일세. 선비는 선비된 자로서의 도리가 있네. 그 도리를 다 하지 않고서 어찌 갓을 쓸 수 있겠나?
[윤선도, 또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다. 그리고 잠시 술잔을 든 채 생각에 잠긴다]
윤선도 : 술이 한 잔 들어가니, 시 한수가 생각나네 그려, 내 시 한번 들어 볼 텐가?
슬프나, 즐거우나, 옳거나, 그르거나
내 몸이 할 일만 닦고 닦을 뿐
그 밖의 다른 일이야 생각하거나 근심할 필요 있겠는가?
나의 일이 잘못된 것인 줄 나라고 어찌 모르겠는가?
이 마음 어리석은 것도 모두가 임을 위한 탓이로구나
아무개도 아무리 헐뜯더라도 임께서 헤아려 주십시오
경원성 진호루 밖에 울며 흐르는 저 시냇물아!
무엇하러 밤낮으로 그칠 줄 모르고 흐르는가?
임 향한 내 뜻을 따라 그칠 줄을 모르는가?
산은 끝없이 길게길게 이어져 있고, 물은 멀리 굽이굽이 이어져 있구나
부모님 그리운 뜻은 많기도 많다.
어디서 처량한 외기러기는 울어울어 나의 마음을 구슬프게 하는가?
어버이 그리워할 줄은 처음부터 알았지만은
임 향한 뜻은 하늘이 만드셨으니
진실로 임을 잊으면 그것이 불효인가 하노라
<견회요(遣懷謠..마음을 달래 노래)..고산이 이이첨 상소로 유배간 후 지은 시>
[고산의 시 읊조리는 소리 사이로, 장구 가락이 처연이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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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성균관 유생이었던 고산 윤선도는 기여이 당시 실세인 이이첨을 비롯한 그 일파들의 횡포를 밝히는 상소를 올린다. '간신 이이첨의 권력 농단이 극에 이르고 왕비의 오빠 유희분, 척신 박승종 등의 권력 남용이 도를 벗어났으니 이이첨을 죽여야 하고 나머지도 합당한 죄를 물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세상은 발칵뒤집혔다. 1612년 진사시험에 합격해 성균관 들어간 지 4년만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30세. 그것이 시작이었다. 일생 그는 유배와 해제의 생활을 반복했다. 언제나 그는 스스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서는 참지 못했다. 훗날 역사는 진리와 정의 앞에서 결코 소신을 굽히지 않는 절의 정신을 보여준 선비로 평하고 있다.
고산 윤선도는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년 전 동숭동에서 태어났다. 정확히 얘기하면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에서 태어났다. 마로니에 공원 한 켠에는 윤선도의 생가터를 알려주는 비가 있다. 그리고 그 비에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인 '어부사시사'가 새겨져 있다. 태어나기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윤선도는 서울에서보다 유배지와 고향인 전라남도 해남에서 더 오랜 생활했다. 잘못된 정치에 대해서는 반드시 상소를 올리고 병자 호란때는 인조가 피난한 남한 산성을 향해 말을 달렸다. 한시도 정치를 한순간도 외면하지는 않았지만 - 어쩌면 정치를 그렇게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만 - 그는 결코 정치인으로서 주류는 되지 못했다. 오히려 오랜 유배생활과 낙향생활에서 그는 많은 시가를 남겨 조선시대 정철과 더불어 시가문학의 대표적인 인물로 우리에게 더 기억되고 있다.
외로운 산, 고산(孤山). 고산은 그의 호처럼 평생 외로웠다. 임금을 향한 마음을 한시도 놓지 않았지만 임금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고산은 자연과 함께하며 그 마음을 시로 달래며 살았다. 요즘으로 보면 시국을 외면하지 않는 깨어있는 비주류 시인이었다는 말이 더 맞을지 모르겠다. 찬 바람 날리는 겨울, 마로니에 공원 한 켠에 그의 생존을 알리는 비가 '외롭게' 서 있다. 잠시 외로운 비에 새겨진 '어부사시사'를 읊조려 본다. 그리고 늘그막에 보길도에서 생을 보내는 고산의 모습을 그려본다.
동풍이 건듯 부니 물결이 고이 닌다
돋달아라 돋달아라
동호를 돌아보며 셔호로 가쟈스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압뫼히 디나가고 뒷뫼히 나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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