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시중금리가 크게 떨어졌지만, 은행권의 가계대출 문턱은 오히려 높아지고 있다. 은행들이 중소기업 대출을 핑계로 이번에는 가계 대출을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물가상승으로 실질임금이 줄어든 가계들은 돈줄마저 끊기면서 세밑에 이중고를 겪고 있다.
◇ 주택담보.신용대출 영업 축소
28일 금융권에 따르면 시중은행들은 가계대출 영업에 대한 대출 심사를 강화하는 방법으로 대출을 축소하고 있다.
신한은행은 최근 1억원 이상 주택담보대출을 하려면 본부 승인을 거치도록 영업점에 지시했다. 일선 영업점은 가능하면 1억원 이상 대출을 취급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은행의 한 지점장은 "신규대출은 1억원 이하 소액 중에서도 꼭 필요한 자금만 해주고 있다"며 "영업점 평가도 대출보다 리스크 관리에 배점을 높게 두니, 가계대출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신한은행은 일부 신용대출 상품의 대출 한도를 대폭 줄였다.
공무원과 정부투자기관 종사자 등을 대상으로 한 `엘리트론'은 최고 1억원에서 5천만 원으로 절반으로 줄였고 판사, 약사 등을 타깃으로 한 `탑스 전문직 우대론'은 최고 3억원에서 2억5천만 원으로, 예비의사와 의사를 대상으로 한 `닥터론'은 2억원에서 1억2천만 원으로 각각 축소했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세계 경기 침체와 경기 변동성이 확대되면서 위험 관리 차원에서 특수직 또는 선별 고객의 신용대출 한도를 실제 사용하는 금액 수준으로 현실화했다"고 설명했다.
하나은행도 주택담보대출과 신용대출 취급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다. 하나은행 담당자는 "최근 대출 심사를 강화해 이자상환능력과 소득의 질, 차입금 상환 여부를 엄격히 따져보고 있다"고 말했다.
신용대출도 전체 신용등급 1∼10등급 중 기존에는 상위 7등급까지 대출을 해줬으나 지금은 7등급도 대출을 해주지 않고 있다.
국민은행은 중도금 대출 등 집단대출 심사를 강화했다. 올 상반기만 해도 아파트 집단대출을 유치하기 위해 다른 은행들과 치열한 금리 경쟁을 벌였으나 지금은 사업성을 철저히 따져 운용하고 있다.
◇ 은행들 "리스크 관리, 담보가 산정 어려워"
은행들이 가계대출 영업을 줄이는 것은 부실 가능성 때문이다. 특히 주택담보대출은 금융시장의 `복병'이다. 주택 거래가 실종된 가운데 주택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경기악화로 가계 실질소득이 마이너스로 돌아서면 상환을 못해 대출이 부실해질 가능성이 있다.
은행들은 부동산 거래가 끊기면서 주택 가격을 정확히 평가할 수 없다는 점도 불안해하고 있다. 은행들은 담보가치를 산정할 때 참고하는 국민은행의 부동산시세 통계가 실제 거래가와 차이가 있다고 보고 있다.
국민은행 부동산 시세는 전국 1만4천여 아파트 단지를 대상으로 8천800여개 해당 지역의 중개업소가 매주 시세를 온라인으로 입력하는 방식으로 표시되는데, 부동산 거래가 일어나지 않다보니까 정확한 시세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모 은행 주택대출 담당자는 "신규 대출을 하려면 담보가치를 정확히 평가해야 하는데, 지금은 담보 평가 작업조차 어렵다"고 말했다.
최근 정부가 중기대출을 연일 압박하는 점도 가계대출이 줄어드는 요인이다. 금융감독원은 지난달 국내 은행들의 해외차입에 대해 지급보증을 해주는 대신 신규 원화 기업대출 가운데 중기대출을 비중을 45% 이상 유지하도록 했다. 연말까지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 비율을 끌어올리는 게 발등의 불인 은행으로서는 중기대출을 늘리려면 가계대출을 줄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모 은행 지점 관계자는 "고객들에게 지금은 기업대출 쪽으로 자금을 집중하고 있어 연내 대출은 어렵고, 내년에 자금 사정이 나아지면 대출을 해주겠다는 식으로 안내하고 있다"고 전했다.
◇ 서민 가계 고통 가중
문제는 앞으로도 은행들의 대출 조이기가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모 은행 담당자는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에서 보듯 선제적인 위험 관리가 필요하다"며 "부동산 시장이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는 신규대출 심사를 강화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질임금이 감소하고 공공요금 인상 등으로 가계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 서민들은 자금줄마저 끊기면서 혹독한 시간을 보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박종규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실물경제가 위축되고 있는 데 은행들이 BIS비율을 맞추려고 가급적이면 대출을 안하고 현찰을 보유하려 해서 정상적인 신용중개 기능이 작동하지 않고 있으며 서민경제를 위축시키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일률적으로 대출을 제한할 것이 아니라 대출자들의 소득과 상환능력 등을 면밀히 분석해 지원할 곳은 지원하는 것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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