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의 이상 열기와 전통 연극의 부진이라는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진 한 해였다. 올해는 '뮤지컬 전성시대'라 불러도 좋을 만큼 엄청난 양의 뮤지컬이 쏟아졌다. 특히 공연계의 대목인 12월에는 '틱, 틱…붐!' '토미' '하드락 카페2' '세븐 템프테이션' '바람의 나라' 등 10여 편에 달하는 뮤지컬이 한꺼번에 몰리는 과열 열기를 보였다. 그러나 작품 수준이 "이제 돈 되는 것은 뮤지컬뿐"이라는 기대치에 부응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중 브로드웨이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다른 작품을 압도했다. 100억 원이라는 국내 공연 사상 최고의 제작비가 투입된 이 뮤지컬은 2일 초연 때 이미 12월분 티켓이 모두 예매됐을 정도로 큰 관심을 모았다. 동명 소설이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를 정도로 신드롬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다. 국내 뮤지컬 중에서는 비언어 퍼포먼스 '난타'와 극단 학전의 '지하철1호선'의 선전이 놀라웠다. '난타'는 400만 달러(약 51억 원)의 개런티를 받고 9월부터 미국 순회공연에 나섰고, '지하철 1호선'은 원작지인 독일은 물론 일본과 중국에서 활발한 순회공연을 벌였다.
<2001년 문화계 결산 연극.뮤지컬 - 한국일보 2001년 12월 18일자 기사>
2001년, 그때만 해도 공연계 최대 성수기인 연말에 10여 편의 뮤지컬이 무대에 올랐다고 '과열'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올해 2008년은 어떨까? 올 한해 우리나라 공연장에 오른 뮤지컬 작품만 무려 137편이다. 그 중 창작 뮤지컬이 90편, 라이선스 뮤지컬이 47편이다. 그나마 2007년에 비교하면 공연 편수가 줄어든 상황이다. 작년에는 창작 115편에 라이선스 45편 등 모두 160편의 뮤지컬이 무대에 올랐다. 공연계 최대 대목이라고 할 수 있는 12월 현재 모든 공연 장르를 망라해 단연 가장 많은 공연 편수를 기록하고 있다. '지붕위의 바이올린' '미녀는 괴로워'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 '캣츠' '두 드림 러브' '지킬 앤 하이드' '오즈의 마법사' '온에어 시즌2' '라디오 스타' '형제는 용감했다' '오 당신' '헤드윅' '달고나' '돌아온 얄개' 등등등등등......... 연말을 겨냥해 올라온 뮤지컬들을 생각나는 대로 꼽아 봐도 금방 10여 편이 넘어간다. 인터넷 검색창에 '뮤지컬'이라는 세 단어를 치면 순식간에 전국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들이 20편이 줄을 맞춰 몇 페이지에 걸쳐 줄을 서 있다. 불과 7년 전인 2001년, 10여 편이 한꺼번에 올랐다고 '과열'이라는 단어를 쓴 것에 비한다면 이제는 '홍수'라는 단어를 써도 부족할 정도다.
대한민국 '연극 1번지'라고 할 수 있는 대학로에도 뮤지컬을 하는 소극장들이 즐비하다. 대학로 예술마당, 스타시티, '라이브극장' '리메이에르' '대학로 씨어터' '알과핵' 등등등, 예전 같으면 연극을 했던 극장들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미 대학로에서 연극보다 소극장 뮤지컬의 공연 편수가 더 상회한 지 오래다.
1980년대 뉴욕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시장은 침체기였다. 뮤지컬 제작자들은 같은 문화 언어권이 영국 런던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뜨고 있었던 '캣츠' '오페라의 유령' '레미제라블' '미스 사이공' 등을 잇따라 뉴욕 브로드웨이로 들여왔다. 그 결과 메이드 인 런던 뮤지컬이 뉴욕 브로드웨이를 강타했고 전세계적인 메가 히트 뮤지컬이 되었다. 당시 미국의 언론은 영국 뮤지컬의 히트를 '브리티쉬 인베이전(British Invasion: 영국의 침공)'이라고 표현했다. 아마 이 표현을 대학로에 적용해도 과하지 않을 듯 싶다. 대학로의 소극장들은 이미 뮤지컬에 의해 접수됐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나라의 뮤지컬 전성시대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2001년 말에서 2002년까지 7개월 동안 공연했던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우리나라 뮤지컬 홍수의 시작은 설앤컴퍼니의 설도윤 대표가 제작한 바로 이 작품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라이센스 형식으로 들여온 이 작품은 100억원의 제작비를 들여 2001년 12월부터 2002년 7월까지 장장 7개월간 공연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100억원이라는 제작비도 그랬고 7개월이라는 공연기간도 그랬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때 만해도 뮤지컬 시장이라는 것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협소할 때다 보니 이런 대형공연에 관객들이 얼마나 들 지를 시험해 본다는 것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대박이었다. 94% 유로객석 점유율에 24만명 관람, 192억원 매출에 20억원의 순이익. 뮤지컬의 불씨는 그렇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월드컵이 열렸던 2002년은 대한민국이 4강의 기적을 이룬 화려하고 흥분됐던 한 해였다. 공연계에서는 명암이 엇갈렸다. 뮤지컬계에서는 2002년 상반기까지 공연한 '오페라의 유령'이 우리나라 뮤지컬의 가능성을 연 한 해였다. 그해 신시뮤지컬컴퍼니의 박명성 대표가 제작한 '유린타운'이 젊은 관객들에게 뮤지컬의 재미를 들였고, '갬블러'가 일본 순회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한국의 뮤지컬이 일본에서 순회공연을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PMC의 송승환 대표가 제작한 '난타'는 뉴욕 빅토리아 극장에서 공연한다고 발표했다. 물론 뉴욕 브로드웨이의 상업 극장은 아니었지만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하는 한국 공연으로서는 역시 최초였다.
반면 연극은 점점 그 빛을 잃어갔다. 특히 그해 6월 한반도를 정말 뜨겁게 달궜던 월드컵은 연극계에는 폼페이의 화산 폭발과도 같은 대재앙이었다. 그 기간 동안 아예 공연을 포기한 극단들이 속출했고 아예 극단 문을 닫은 곳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대학로 연극 바닥에서는 아직까지도 연극을 한다는 것에 대한 자존심만은 굳건했다. 연극을 만드는 극단들도 뮤지컬을 제작하겠다고 기웃거리지도 않았고, 배우들도 뮤지컬 배우보다는 연극 배우를 내심 높이 쳤다.
2003년. 드디어 본격적으로 외국의 뮤지컬들이 한국에 몰려들기 시작한다. 뮤지컬 수입의 물꼬가 트인 해였다. 설도윤 대표는 연초에 '오페라의 유령' 속편으로 뮤지컬 '캣츠'를 들여왔다. 전편에 이어 세계적인 뮤지컬 제작회사인 영국의 RUG 회사의 작품이었다. 파란 눈의 늘씬 늘씬한 고양이들이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갬블러'와 '렌트'로 명성을 쌓아가던 신시뮤지컬 컴퍼니의 박명성 대표는 그해 여름 '시카고'를 들여왔다. 뮤지컬 영화로 인기를 얻었던 영화 '시카고'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 관객들은 파란 눈의 섹시한 여배우들이 보여준 밥 파시의 관능적인 춤과 재즈에 또 한 번 매료됐다. 웬만한 대극장에서 뮤지컬 공연이 눈에 띄게 늘면서 공연계에서는 뮤지컬 전용극장 바람이 불었다. 제작자들은 다들 조만간 뮤지컬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뮤지컬 전용극장의 필요성을 저마다 앞 다퉈 얘기했다. 예술의 전당에서도 뮤지컬 전용극장을 짓기 위해 사업을 구체적으로 추진했던 때도 이때였다. 물론 예술의 전당은 결국 이 사업을 접었다. 그러던 중 SJ엔터테인먼트라는 제작사가 '싱잉 인 더 레인'을 들여오면서 국내 최초로 뮤지컬 전용극장에서 공연을 올린다고 발표했다. 경향신문 뒤편에 있는 극장이었는데 이름은 '팝콘하우스'였다. 하지만 공연장 시설은 기대만큼 좋지 않았고 공연의 결과도 예상만큼 흥행되지 않았다. 지금은 뮤지컬 배우로 자리 잡은 가수 바다가 처음 뮤지컬 무대에 오른 곳도 '팝콘 하우스'였다. 당 시 남경주씨와 바다를 내세운 뮤지컬 '페퍼민트'는 당시 야심찬 창작 뮤지컬이었지만 역시 결과는 기대만큼 만족스럽지 못했다. 우리나라 최초라는 수식어 차지했던 '팝콘하우스'극장은 그 뒤, 회사와 함께 조용히 사라졌다. 그렇지만 '뮤지컬이 대세'라는 큰 물결을 막을 순 없었다.
대학로에는 불황의 그늘이 점점 깊어져 갔다. 한번 대중들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 연극은 좀처럼 회생의 기미를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이른바 '대한민국 최대불황'인 연극계의 발버둥이 시작됐다. 연극열전 시리즈의 기획자인 동숭아트센터 홍기유 대표가 '생연극 시리즈'라는 프로젝트를 이때 처음 기획해서 연극 관객들에게 던졌다. 이 프로젝트에는 극단 '차이무' 그리고 극단 '이다'가 의기 투합했다.
'비언소' '늘근도둑 이야기' '날 보러와요' '이발사 박봉구' 등등 과거 흥행에 성공했던 검증된 작품들을 1년간 연달아 공연했다. 뜸했던 관객들의 발길은 길게 이어졌다. 명계남 씨와 지금은 유명한 배우가 된 박철민씨가 출연한 '늘근 도둑 이야기'는 코믹한 대사와 풍자로 매일 밤마다 꽉꽉 찼다. 특히 2003년 상반기 영화로 개봉돼 큰 히트를 친 '살인의 추억'이 연극 '날 보러와요'를 원작으로 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당시 권해효 씨가 출연했던 연극 '날 보러와요'의 극장은 그야말로 미어터졌다. 대학로에는 그해 '생연극 시리즈'가 가뭄의 단비처럼 대학로를 촉촉이 적셨다. 하지만 역시 말 그대로 가뭄의 단비정도였다. 쩍쩍 갈라진 메마른 땅은 금방 다시 메마른 먼지를 풀풀 날렸다.
이듬해 홍기유 대표는 전년도 '생연극 시리즈'에서 연극 부활의 자신감을 얻고 '연극 열전'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기치를 올렸다. 홍기유 대표는 대학 동기인 장진 감독과 손을 잡고 지난 1980년대부터 했던 연극 가운데 다시 보고 싶은 연극 15편을 골라 무대에 올리기로 했다.
"좋은 작품이 갖고 있는 힘은 대다한 것이어서 재공연이 갖는 시너지 효과는 생각보다 크다는 걸 확인한 그는 '그렇다면 이런 프로젝트를 범극단적으로 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했고 젊은 혈기에 '사고'를 치게 된다. 좀 큰 사고라 혼자 감당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고 서울예전 연극과 89학번 동기로 막역한 사이이자 이런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카리스카가 필요한 프로젝트엔 적임자라고 생각한 장진 감독을 꼬셔서 의기투합한다. 개인적으로도 장진 감독을 좋아하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프로젝트에 그를 끌어들인 이유는 젊은 연극인이 주축이 돼야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2004년 1월 한겨레 21 인터뷰 기사 중에서>
전년도 보다 범위가 확대된 대학로 극단의 연합 프로젝트는 홍기유 대표에 의해 다시 출발했다. 두꺼운 공연연감을 놓고서 지난 20년간 했던 수 많은 연극 가운데서 뭔가 재미있으면서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그런 작품을 고르기란 그렇게 쉽지많은 않았다. 고민 고민 끝에 '불 좀 꺼주세요' '청춘예찬' '에쿠우스' '관객모독' '한씨연대기' '백마강 달밤에' 등등등의 작품 15편을 결정했다.
"두 사람은 한 가지 확실한 기준을 잡는다. 다른 사람이 좋다 했거나 언론이 좋다 한걸 모두 잊고 그저 자신들의 스무살 때를 떠올렸다. 어느덧 삼십대의 대표 자리에 앉은 그들에게도 빛나는 스무살이 있었고 그때 그들은 지금보다 더 열정적으로 연극에 미쳐 있었다. 밥 먹는 건 잊어도 연극 보는 일은 마치 자신들이 그 공연을 보지 않으면 한국 연극계가 거꾸로 돌아가기라도 할 것은 같은 심정으로 대학로의 연극들을 닥치는 대로 보던 시절이었다. 그때 머리와 가슴에 화인을 맞은 작품들! 그렇게 기준을 잡고 나니 고르기가 쉬웠다. 프로젝트의 프로그래머로서 자기가 감동한 작품이어야 남에게도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거다." <2004년 1월 한겨레 21 인터뷰 기사 중에서>
'생연극 시리즈'에 이은 두 번째 기획 '연극 열전'은 그렇게 시작됐다. 전년도의 성공적인 경험에 의욕은 더 넘쳤지만 흥행결과는 전년도만 같지 못했다. 12만명이 넘는 관객들이 소극장을 찾았고, 평균 유료 관객 점유율 80%로 에 선전은 했지만 계산기는 냉정했다. 홍기유 대표는 당시 3억원이 넘는 돈을 손해를 봤다고 한다. 연극 한편을 제작하는 데, 물론 기간과 인력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1억원 정도면 꽤 많이 들인 작품인데 3억원 이상 손해를 봤다면 상당히 큰 액수였다. 대학로는 침체일로였다. 그해 연말 연극계를 결산한 한 신문은 이런 제목을 달았다. ‘2004년 최악의 관객 기근에 시달린 연극계’ !
뮤지컬은 연초부터 탄탄대로였다. 2004년 그 해를 대표할만한 뮤지컬을 꼽으라면 단연 신시 뮤지컬 컴퍼니의 박명성 대표가 제작한 '맘마미아'와 뮤지컬 스타 조승우를 탄생시킨 오디 뮤지컬 컴퍼니의 '지킬 앤 하이드'였다.
연초부터 공연에 들어간 '맘마미아'의 롱런은 대단한 우려 속에 시작됐다. 우려는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시뮤지컬컴퍼니는 문화부 기자들을 데리고 런던 웨스트엔드로 동행 취재길에 올랐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자들은 '맘마미아'를 보고 극작가와 연출가를 인터뷰 했다. 아바의 노래는 귀에 속속 들려왔고 흥겨웠다. 낮에 본 공연인데도 극장에는 관객들로 가득했다. 관객들의 반응은 대단히 좋았다. 그러나 당시 기자들은 한국 공연에 대해 우려 섞인 기대를 털어놨다. 아바의 노랫말이 영어로는 괜찮은데 한국말로 번역했을 때 과연 그 맛이 그대로 잘 전달이 될까하는 부분이었다. 당시 극작가는 아바의 원곡에서 단 한 가사만 바꿨을 뿐 원곡 가사를 그대로 썼다고 했다. 그리고 그 가사가 절묘하게 이어지게끔 극본을 썼다고 했다. 바로 그 점이 관객들에게도 크게 어필했고 뮤지컬 '맘마미아'의 큰 매력 중 하나였다. 또 아바의 노래에 익숙한 관객들은 주로 30대 후반부터 인데 그들은 아직까지 뮤지컬의 주 관객들이 아니었다는 점도 걱정거리였다. 이런 저런 우려 속에 '오페라의 유령'이후 최대 제작비인 100억원의 돈이 들어갔다.
뮤지컬 제작자들은 공연 첫날을 가장 두려워한다. 첫날 공연의 관객들의 반응, 그것이 공연의 성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공연 첫날, 반응은 모든 우려와 걱정을 싹 쓸어버렸다. 흥겨운 아바의 노래 속에 중장년층의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후 이른바 강남 아줌마들이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프리뷰 공연 첫날의 기억을 신시뮤지컬컴퍼니 박명성 대표는 이렇게 회고했다.
"다행히 프리뷰 공연의 티켓은 전석 매진이 되었지만 결코 반가운 소식만은 아니었다. 전석 매진은 공연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공연이 만족스러우면 그들은 제작자에게 천사가 되지만 공연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악마보다 무서운 사람이 된다. 밤을 꼬박 새운 나는 프리뷰 공연이 시작되자 극장 1층 뒤에 섰다. 나는 매 공연마다 벽에 기대서서 보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버렸다. 초조하고 긴장되면 안절부절 해서 서서 보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공연이 끝났다. 환호. 기립박수. 눈물이 핑 돌고 가슴이 뜨거워졌다. 감동이 그 동안의 고생을 어루만져주었다. 극단 식구들도 훌쩍 훌쩍 눈물을 흘렸다. 서로 얼싸 안기도 했다. 관객들의 감동, 나의 감동, 식구들의 감동, 모든 제작진의 감동. 이런 뜨거운 감동 때문에 이 어려운 일을 마약에 중독된 사람처럼 계속하는지도 모르겠다. 관객들의 가슴에 불을 지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직업인가. 이것이 내가 여전히 뮤지컬을 하는 이유다."
'맘마미아'는 4개월간의 공연으로 130억 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후 매년 히트하는 롱런 작품이 되었다. '오페라의 유령'이 뮤지컬의 불씨였다면 '맘마미아'는 뮤지컬의 불씨에 중장년층의 관객들을 끌어들이며 그 불씨에 기름을 부었다. '오페라의 유령' 제작사인 설앤컴퍼니도 그해 디즈니 대작인 '미녀와 야수'를 LG아트센터에서 공연했지만 기대만큼 흥행기록을 세우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해 여름 또 하나의 뮤지컬이 터졌다. 뮤지컬 스타 ‘조승우’를 탄생시킨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비교적 저렴한 15억원의 제작비를 들인 이 작품은 약 한달간의 짧은 공연기간 동안, 공연종료 2주전 전석매진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총 4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4억원의 수익을 남겼다.
특히 아바의 히트곡으로 성공한 '맘마미아'는 관객들의 폭을 넓혔다는 평가 외에도 이른바 당시 창작 뮤지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맘마미아'처럼 7080년 세대의 히트곡으로 무장한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무대에 올랐고, 그보다는 좀 더 젊은 관객들을 타켓으로 한 8090히트곡으로 내세운 '달고나'가 대학로 소극장에서 인기를 얻었다. 슬슬 그럴싸한 창작 뮤지컬 공연이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몇 년 전부터 계속돼온 '마리아 마리아', 새롭게 버전을 바꿔 올라온 '더플레이X' '터널' '청년 장준하' '안악지애사' '소나기' 등등등......., 하지만 요즘처럼 재미있게 볼만한 창작 뮤지컬은 드물었다.
2004년 연극이 더 시들해지고 뮤지컬이 일약 부상할 때, 영화는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등 초대박을 터뜨렸다. 한국 영화 관객 점유율이 1년 내내 60% 언저리를 오르락 내리락하며 일찌감치 헐리우드 대작들을 따돌리며 독주했다. 김기덕 감독의 '사마리아'와 '빈집'이 각각 베를린 영화제와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고,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한국 영화가 이쯤 되니 이제 스크린 쿼터제를 축소하자는 말이 나와 영화인들이 발끈했다. 2004년, 바야흐로 한국 영화는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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