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친형 노건평 씨의 비리의혹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 합니다. '터무니 없는 소리'라는 대답으로 일관하던 노건평 씨는 결국 지난 목요일 오후 구속됐습니다. 물론 구속된 사실만 가지고 노 씨가 범죄자인 것처럼 몰아가서는 안됩니다. 법원에서 형이 확정되기 이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범죄자 취급을 받아서는 안되니까요.
그러나 범죄를 저질렀다고 보기에 상당한 이유가 있고, 증거를 인멸한 우려가 있거나, 도주의 염려가 있을 때 발부하는 것이 구속영장이란 점을 감안하면.. 노건평 씨의 문제는 어딘가 모르게 개운치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아직 검찰이 수사 중이고, 법정 공방도 남아 있으니 일이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지는 조금 더 지켜 볼 일입니다.
◎ "니가 가라 봉하마을"... 뜬금 없는 전화 한 통
시경 캡에게서 뜬금없는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미안한데.. 딱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다.. 니가 봉하마을엘 좀 다녀와야겠다."
노건평 씨 관련 내용은 법조팀 담당인지라 솔직히 조금 당황했습니다.(제가 속한 사회2부는 사건팀과 법조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저는 사건팀 소속입니다.) 서둘러 귀사하라는 지시를 받고 회사로 돌아왔습니다. 회사에는 험한일을 도맡아 하기로 유명한 VJ 현우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 미안한듯 웃고 계신 법조팀장님도 보입니다. "야, 미안하다. 가서 할 일이 좀 많아."
비행기를 예약하고, 차량을 예약하고는 부리나케 김포공항으로 향했습니다. 출력한 관련 기사 한뭉치를 들고 기내에 들어서면서 모든 조간신문들을 집어들었습니다. <한 부씩만 들고 가세요>란 문구와 제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는 스튜어디스의 떨떠름한 미소가 마음에 걸렸지만,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김해공항으로 가는 내내 기사를 읽고, 만나야 할 사람을 추려내고, 질문할 내용들을 뽑고, 동선을 정리했습니다. 지시받은 내용이 많았기 때문에 대충봐도 시간이 빠듯했습니다.
"현우아, 미안한데 시간이 없다. 점심은 대충 가면서 먹자." 차량 수속을 마친 후 편의점엘 들렀습니다. 김밥과 우유, 샌드위치와 생수를 한웅큼 사 들고는 차에 올랐습니다. 김해에서 취재를 마치고 부산지국에서 영상과 기사를 송출해야 했기 때문에 삐끗하면 뉴스를 펑크내는 최악의 상황도 생길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제 기사를 위한 내용 뿐 아니라 다른 선배 기사와 관련된 내용도 담아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습니다.
우선 박연차 씨가 노건평 씨에게 공사를 주었다는 한 골프장으로 향했습니다. 경비원들과 맞딱뜨리면 본전도 못 건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찍고 빠지자고 말을 맞췄습니다. 저는 운전을 하고 현우는 화면을 담았습니다. 예상했던대로 골프장을 도는 동안 3번이나 경비원들을 만났습니다. 다행히 골프장이 넓었기 때문에 그렇게 도망쳐 나오면서도 VJ 현우는 필요한 화면을 모두 찍는 센스를 발휘했습니다.
분주한 중에 법조반장 허윤석 선배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요한아 미안한데. 민방 협조가 안된단다. 노 대통령도 니가 만나야겠다." 갑갑함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미친듯이 차를 몰아 봉하마을로 향했습니다. 오후 2시가 대화 예정시간이었기 때문에, 시쳇말로 시간이 간당간당 했습니다. 앰뷸런스 수준으로 현우가 차를 모는 동안, 저는 옆에서 변경된 스케줄을 다시 정리했습니다. 멀미가 날 것 같았습니다.
봉하마을은 생각했던 것보다 아담했습니다. 많은 언론사들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광주에서 오신 단체 관광객들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노 전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날 방문객들 중엔 나이 지긋하신 아주머니 분들이 많았습니다. 여기저기서 왁자지껄 아주머니들의 대화와 웃음소리가 오갔습니다. 처음 방문한 봉하마을이 신기했던 저도 잠시 짬을 내 이곳저곳을 둘러봤습니다.
잠시 후 예정된 시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박수와 함께 약간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맨 앞 줄에서 수첩과 무선마이크를 쥐어든 제가 반가울리 없었겠지만, 노 전 대통령은 저를 비롯한 많은 방문객 분들께 환한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네셨습니다. 그리고는 약 5분 남짓, 노 전 대통령은 100여 명의 방문객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눴습니다.
◎ "제가 방금 또 실수했어요"... 말 해놓고 화들짝
노 전 대통령을 직접 마주한 것은 저도 처음이었습니다. 정치부나 청와대 선배들이야 볼 기회가 꽤 있었겠지만, 저같은 사회부 기자들은 사실 이런 분들을 만날 일이 없지요. 방문객들이나 저나 노 전 대통령의 모습이 신기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방문객들의 질문과 노 전 대통령의 대답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던 도중, 저와 다른 취재진들을 의식한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이 나왔습니다. 내용을 왜곡하지 않기 위해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을 모두 옮겨 보겠습니다.
= (짝짝짝. 신기해요.) 산에 가보셨어요?
= (네. 광주에서 왔어요.) 여기는 산이 낮지요? 낮으면 낮은대로 맛이 있고 그렇지요.
= 저도 전에 무등산에 한 번 가봤는데요. (점심도 안 먹고 왔어요.)
= (저 뒷산에는 올라갈 수 있습니까?) 어디요. 아까 갔다왔다고 안 하셨어요?
= (아니오. 저기 아니고 --산 갔다 왔어요. **산 이름을 제대로 못 들어서.. 죄송**)
= (청와대가 더 편하십니까 지금이 더 편하십니까?) 예?
= (지금 마음이 더 편하십니까?) 아무데나 다 안편하지요.
= (청와대 보단 여기가 더 편하신지요?) 제가 지금 그.. 조금 전에도 제가 실수했어요.
말을.. 그런 표현도 하면.. 바로 (언론에) 나가요. (하하하.)
= (요즘엔 독자들도 다 새겨 듣습니다.) 뭐.. 새겨 들으시는 분들도 계시고 아닌 분들도 계시고.
= (소감 한마디만 해 주시죠.) 고마 오늘은 제가 오늘 인사 나온걸로 양해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길게 얘기를 할 수도 없고. 또 이제 가끔 손님이 적을 때는 사진 모델 서비스도 하는데
= (찍어주세요. 날씨도 이렇게 좋은데요) 지금 상황이 너무 잔인해서 제가 그렇게 여유를 부릴 형편이 안되는 것 같아요. 그냥 양해 하시고요.(예) 뒷날 또 언제 기회가 있지 않겠습니까. (힘내세요. 힘내십시오.)
[보라색: 여자 / 갈색: 남자 / 검정색: 남여]
저는 정치부 기자도 아니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주제넘게 노 전 대통령의 행동을 이리저리 해석할 생각은 더더욱 없고요. 다만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내신 분으로써, 모든 정치인들이 그토록 원하는 목표를 이미 이루신 분으로써, 그렇게 언론의 해석에 좋지않은 감정을 즉각적으로 표현해 보이시는 것이 - 주제넘게 토를 달자면 - 솔직히 조금 안쓰러워 보였습니다.
노 전 대통령이 일부 언론들의 의도 담긴 해석과 몰아가기식 보도에 꽤 많은 마음고생을 하셨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저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겠지요. 그리고 어지간히 지각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해석과 보도를 봉하마을의 어느 남자분 말씀처럼 걸러서 들었을 테고요. 물론 노 전 대통령 말씀처럼 그대로 받아들이는 분들도 계셨을테지만, 오만가지 의견이 섞여 돌아가는 세상 그것까지 어떻게 하겠습니까.
작은 표현도 여지가 있는 말이 해석된다는 걸 알고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해석되는 것이 싫다면,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편이 훨씬 현명한 일일 겁니다. 선문답 같은 표현으로 넌지시 답을 표하는 방법도 있을테고요. 실제로 그렇게 하시는 분들이 꽤 계시기도 합니다. 기자들의 의도섞인 질문에 해석의 여지가 없이, 도저히 쓸 수 없는 대답만 하면서 요리조리 빠져나가시는 분들도 계시고, 촌철살인같은 한 마디로 상황을 명쾌히 정리하시는 분들도 계시지요.
반기문 UN 사무총장의 경우, 외교부 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주변 기자들이 반 장관을 '미꾸라지'라고 부르기도 했답니다. 어느 경우에도, 어떤 질문에도 반 총장은 여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저는 그런 처신을 현명함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물론 그런 현명함은 넉넉한 아량에서 비롯되는 것일테고요. 노 전 대통령이 아량과 현명함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치졸하고 졸열해 보이는 기자들과 그런 사람들이 쏟아내는 기사들을 현명하게 다루는 방법도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말 안 통하는 아이를 붙잡고 똑같이 치고받고 싸우는 것보다, 적당히 몇대 맞더라도 허허 웃으며 당해주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요. 치졸하고 졸열하지 않은 기자들도 있다는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말입니다.
다른 기자들은 방문객들 뒷편에 서 계셨기 때문에, 맨 앞 줄에 서서 마이크를 들이 대고 있던 저는 방문객들과 대화를 나누는 노 전 대통령과 여러차례 눈이 마주쳤습니다. 노 전 대통령의 '실수했다'는 말이 저 때문에 나왔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도 <상황이 잔인하다>던 노 전 대통령의 말이 머릿속에 오래도록 맴돌았습니다. "형님과 통화는 해 보셨습니까?" "이래저래 생각이 많으실텐데 심경이 어떠십니까?"하는 질문을 할 생각이었지만, 상황이 잔인하다는 말 한마디로 충분히 해석이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며 물러서는 노 전 대통령과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쳤습니다. 제가 혹 질문을 할까 궁금해 하시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습니다. 모든 언론인들이 노 전 대통령의 생각대로 마음대로 해석하고 침소봉대하지는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더군요. 하지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눈인사로 대신했습니다. 기사로 답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노 전 대통령이 제 그런 속 뜻을 알 수는 없었겠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제 이런 바람들을 꼭 알게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금보다 훨씬 더 넉넉하고 후덕하게 언론과 대중을 대하시게 되는 날이 오게 되길 바랍니다.
|
[편집자주] '겸손과 존중'이 취재의 좌우명이라는 김요한 기자는 2006년 SBS 보도국에 입사해 사회2부 사건팀에서 활약 중입니다. 섬세하고 끈질긴 취재력과 함께 수준급 실력의 '드럼' 연주까지 보도국의 팔방미인으로 꼽힙니다. |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