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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연가 - 플라뇌르

 

나는 사람이 많지 않은, 조용한 대학로의 아침을 좋아한다. 지하철에서 내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고, 발걸음 하나 하나를 살포시 눈으로 밟으며, 한적한 마로니에 공원을 유유히 둘러보고, 대학로 이 골목 저 골목을 할일 없는 한량처럼 배회한다. 고우영 만화전을 하는 미술관을 들어가 보기도 하고, 장사를 하기 위해 자리를 펴는 노점상 아저씨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한다. 또 때론 혼자 앉을만한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행인들을 하나 둘 세면서 나만의 눈의 유희를 즐기곤 한다. 이때만큼은 시간도 잔잔한 강물처럼 더디 흘러간다. 초침 없는 시계의 분침과 시침은 여전히 미동도 없다. 시간의 점심 약속을 한 극단 직원과의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도 여유가 있다. 

대학로를 홀로 거닐다보면 나는 공간에 따라 사람들의 걷는 속도가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버스 정류장이 있는 대학로 대로변을 걷는 사람들, 대학로로 좀 더 들어와 소극장과 음식점들이 있는 골목길을 걷는 사람들, 그리고 예쁜 카페가 있고 옛 한옥 주택들이 드문 드문 있는 대학로 저 안쪽 골목길을 걷는 사람들의 걷는 속도가 다름을 나는 눈으로 본다. 사람들의 발걸음은 길거리 자동차들의 소음이 작아질수록 점점 느려진다. 대학로 대로변을 걷는 사람들 보다는 대학로 안쪽을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더 느리고, 대학로 안쪽을 걷는 사람들 보다 한적한 주택가가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걸음은 훨씬 더 여유롭다.

물론 나 역시 그 흐름에 예외가 아니다. 나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것이 별로 많지 않은 대로변에서는 차량의 속도와 함께 인도를 걷는 다른 사람들의 걷는 속도에 나도 모르게 내 발걸음도 그 속도에 맞춰 리듬을 탄다. 그러다 KFC 건물을 지난 대학로 안쪽으로 들어오면 나의 시선은 대학로 공연 게시판을 차례 차례 훑어보기도 하고, 음식점 앞에 내놓은 진열된 가짜 음식을 보며 뭐가 맛있을까 하고 한참을 서서 보기도 한다. 시선이 머무는 시간만큼 발걸음도 차츰 느려진다.

안단테~ 안단테~................ 카페의 유리창 너머로 지나가는 나를 무표정한 표정으로 보는 사람, 나 역시 그 사람을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며 지나가고, 그러다 눈빛이 마주치면 자연스레 곧 서로의 시선은 엇갈린다. 나는 내 앞에 다가오는 새로운 피사체로, 그는 그의 얼굴 아래에 놓인 커피 잔으로 고개를 숙인다. 플라뇌르. 언제가 어느 책에서 우연히 이 단어를 만났다. 나는 지금 대학로를 느릿 느릿 걷는, 바로 그 플라뇌르다. 

"플라뇌르는 '산책을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플라뇌르는 도시의 거리를 거닐며 아이와 같은 호기심으로 사소하기 짝이 없는 사건들이나 우연히 만나는 괴상한 장면들을 구경하며 자기 내면과 때로는 실없는, 때로는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을 사명으로 삼은 사람을 말한다." 19세기 대표적인 플라뇌르였던 보들레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플라뇌르는 다채로운 풍경에서 자신만의 즐거움을 맛보는 방관자이다. 동요하는 것이건 움직이는 것이건 덧없는 것이건 영원한 것이건 무엇이건 좋다. 집은 아니지만 어디서나 집처럼 편안함을 느낀다. 모든 사람들 바라보고 당신이 모든 사물의 중심이지만 정작 자신은 그 모두에게 숨어 있다."   
                                                                                               <보헤미안의 파리 '에릭 메이슬'>

대학로는 혼자 산책하듯 걷기에 참 좋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많지 않은 아침이라면 더욱 좋다. 그때라면 평소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지나가던 시비 앞에 잠시 머물러 시 한편을 읽을 수는 여유도 부릴 수 있다. 정신없이 사람들이 오가는 만남의 광장인 KFC 앞에 있는 시비(詩碑)도 플라뇌르에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학의 공간이 된다.

                       

 

붉은 색 보도블록 퍼즐을 따라 걷다보면 신문을 펴 들고 있는 세 남자의 조각상이 나타난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모자를 쓴 세 사내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신문을 접고, 뮤지컬 시카고를 연출한 밥 파시 스타일의 섹시한 댄스를 즉석에서 펼쳐 보일 것만 같다. 어디선가 뮤지컬 시카고의 재즈 음악이 들리는 것만 같다. 

푸른 청동색의 양복이 어느새 반짝거리는 검정색으로 변한다. 일제히 신문을 뒤로 던진 세 사내는 여전히 고개를 깊숙이 숙인 채 중절모의 앞 챙에 가볍게 손을 얹는다. 왼쪽 발과 오른쪽 발을 살짝 살짝 바꿔가며 앞 뒤로 내밀며 무겁고 섹시한 포스를 발산한다. 묵중한 첼로의 현이 퉁~ 퉁~ 박자를 맞춘다. 이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오른발과 허리를 움직이며 세 사내의 몸짓은 점점 역동적으로 변해간다. 그리고 드디어 두 팔과 두 발이 교차되면서 세 사내의 근육질 몸매가 검정 실루엣 사이로 살짝 살짝 비친다.  

어디 차분히 앉아서 볼 객석은 없을까? 저기 두 사내가 안간힘을 쓰며 들고 있는 벤치가 보인다. 고개를 한껏 올리고서 벤치의 양쪽 끝을 잡고 온 힘을 다해 들고 있는 두 사내의 벤치에 내 엉덩이를 슬쩍 올려본다.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힘들어 하는 두 사내에 대한 나의 배려일까?

잠깐 자리에 앉는 사이 춤추던 세 사내는 어느새 다시 신문을 펴 들고 있다. 한가한 시간 천천히 걷는 사람을 위한 짤막한 프리뷰 공연이었나 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발걸음 되돌린다. 수퍼 마켓 옆 지하 소극장 앞에 세워진 배너 광고가 눈에 들어온다. 강풀의 만화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하고 있다. 강태기씨와 최주봉씨가 출연하는 연극, 문득 영화로 만들어진다던 강풀의 '26년'는 어떻게 됐을까 궁금해진다. 

때론 혼자일 때가 필요하다. 여럿이 함께가 아니라 혼자일 때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 속에 섞여 있지 않을 때, 그런 때에만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평소 같으면 그것이 그곳에 있었는지도 모른 채 지나칠 그 무엇이 눈에 들어온다. 플라뇌르, 느리게 느리게 홀로 걸을 때, 우리는 나의 곁에 항상 있었던 결코 낯설지 않은 것들과 대면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혼자일 때 비로소 진정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보고 싶은 것에 나의 시선과 생각을 풀어놓을 수 있다. 그리고 나에게 숨겨져 있는 수줍음 많이 타는 나를 만날 수 있다.

"혼자와 하나의 의미가 진정하게 귀결하는 지점은 '나'이다. 세상을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라고 내세우는 '나'가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있으니 "감히 내가 누군데"라거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하는 말투가 생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때 내세우는 '나'는 진정한 내가 아니다. 세파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낸 투구와 갑옷을 걸치고 그것이 '나'라고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그런 자아를 일컬어 '망상자아'라고 부른다.

혼자 길을 떠나는 이유는 망상자아를 버리기 위해서이다. 달리 말하면 근원자아를 만나기 위해서이다. 진정한 자아를 만나고 싶고, 진정한 자아로 살고 싶다는 갈망이 길을 떠나게 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아로 온전한 삶을 살고 싶다는 바람은 욕심이 아니다. 그 완전한 충만, 완전한 하나, 완전한 혼자의 상태를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람은 과일의 씨앗처럼 잘 여문 고독에 익숙해지고 고독과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고독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끝없이 떠나고 돌아오는 일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나를 흐려지게 만드는 일이다. 내가 지워져 보이지 않거나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 나는 길을 떠나 나를 만날 수 있는 장소로 간다. 혼자인 상태. 하나인 상태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가춘 곳 그리고 오랜 친근함 속에서 정신적 긴장감을 완전하게 풀어놓을 수 있는 곳."
                                                          <혼자일때 그곳에 간다 - 박상우 서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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