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시장이나 학계에서는 "말만 선제적 대응이지 뒷북 대응, 엇박자 대응, 본질을 놓친 대응이다" 라는 평가가 훨씬 많습니다. 정책당국자들이야 억울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걱정할 만한 이유가 많이 있습니다.
세계 경제가 동반 침체를 겪는 국면에 접어든 것인 만큼 수출이 감소하는 것이야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다지만 이럴 때일 수록 내부적 불안요소를 '선제적'으로 제거하고 내수를 살려야 하는데 '폭탄돌리기'를 시작하고 있다는 불안감이 들때가 많습니다. 바로 미분양을 잔뜩 갖고 있는 건설사,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부실을 시간이 갈수록 더 앉게 될 가능성이 높은 저축은행과 은행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난 9월말 현재 전국 미분양 가구 숫자는 15만 7천 가구가 조금 넘습니다. 하지만 건설업체들이 대부분 축소신고를 했다는 것이 정설이어서 업계에서는 최소 25만 가구에서 많게는 30만 가구에 이를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를 자산가치로 보면 대략 40~45조원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난해 우리 경제규모(GDP)의 5% 수준입니다.
일반 제조업체에 비유를 하면 미분양 가구는 재고입니다. 백화점에서 망한 의료업체들이 '땡처리'를 하듯이 아주 싸게 팔거나 아니면 상당기간 금융비용을 감내한 뒤 나중에 팔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는 거죠.
파생상품이라는 '괴물'을 통해 증폭되긴 했지만 세계적인 경제위기의 진앙지인 미국의 서브프라임 시장이 미국 GDP의 4%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물량일 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미국에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기반으로 한 복잡한 파생상품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아파트를 기반으로 한 프로젝트 파이낸싱 대출이 있죠. 이 대출 규모가 지난 6월 기준으로 97조원입니다. 지난해 우리 GDP 11%에 육박하는 액수입니다.
문제는 이 건설 프로젝트 파이낸싱 가운데 60% 이상이 분양 전 대출이고, 분양된 사업장도 절반 정도는 분양률이 50%도 안 됩니다.
이런 지적들이 나올 때마다 금융당국에서는 '담보가 확실하고 연체율이 저축은행은 14%, 은행은 1% 미만으로 낮다'며 문제가 없다는 반응이지만 지금 세계 경제의 문제는 빚이 독이 되고 있는 Deleverage(역지렛대 현상)에 있고 특히 Deflation(자산가치 하락)과 맞물려 악순환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쉽게말해 빚 많은 기업은 위험해 지고 이 빚이 근간으로 삼고있는 부동산 가격은 하락하지만 살 사람은 없는 현실, 그래서 빚 진 기업들이 더 부실해 지는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는 거죠. 이런 악순환에 빠지면 연체율이나 부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증가해 통계가 나올 때쯤이면 이미 상황은 악화될 대로 악화된 뒤가 됩니다.
실제로 저축은행의 PF 연체율은 이미 19%를 넘었다는 저축은행 협회 내부 조사결과가 있습니다. 은행 역시 PF 대출 잔액이 계속 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바로 PF 대출 가운데 분양 전 대출(브릿지 론) 비중이 30%를 넘기 때문입니다.
분양 전 대출은 들어오는 현금은 없는데 각종 비용은 대줘야해 매년 20% 가까이 대출액이 증가합니다.
더욱이 완공 뒤 분양을 했는데 부동산 경기침체로 미분양이 돼 버리면 고스란히 부실로 자리잡게 되는 거죠.
당장 내년부터 우리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줄 수 있는 이 '부실폭탄'을 제거하려면 구조조정을 통한 과감한 '선제적 대응'을 해야하는데 정부는 건설사 유동성 지원과 부동산 경기 활성화에만 주력하고 건설사들은 자구노력에는 관심이 없고 지원방안이라는 당근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1990년대 부동산 거품 붕괴 당시 일본이 부실의 본질인 건설사와 금융에 대한 구조조정은 소홀히 하고 부동산 시장 위축에만 신경써 부동산 대출 총량규제, 세금경감, 규제완화, 유동성 공급정책 등만을 처방해 '잃어버린 10년'을 가져왔던 점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당시 일본의 정책기조는 부동산 가격만 안정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판단이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막대한 재정자금을 투입해 공공투자 중심의 경기활성화 정책에만 나섰는데 부실을 초래한 본질은 그대로 두는 바람에 결국 재정적자만 키웠습니다.
지금 우리 정부가 내놓은 정책과 거의 비슷하죠.
이헌재 전 부총리는 정부가 필요하다면 극약처방이라도 내야한다며 강도높은 구조조정을 강조했습니다.
대주단이라는 형태로 '인센티브'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명백하고 객관적인 가이드라인을 먼저 밝혀 시장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가혹하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외환위기 당시 부채비율 200% 처럼 구체적인 숫자를 제시해 개별 기업이 스스로 그 기준에 맞추기 위해 물건을 팔고 인력을 조정하는 과정을 거치도록 해 통과한 기업은 지원하고 기준에 미달된 기업은 정리되도록 해 부실을 줄여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건설사들이 프로젝트 파이낸싱 관련 부채를 시행사 등에 떠넘기고 이익만 재무제표에 반영한다는 점을 들어 프로젝트 파이낸싱까지를 포함한 '수정부채비율'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앞으로 두 세달이 중요하다. 진행형 위기라는 표현은 이런 것이다. 위기 자체가 엄중하지는 않지만 위기가 진행되고 있다. 사전적 예방비용보다는 사후적 비용이 훨씬 많이 들어간다"
'이헌재 사단'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위기극복의 노하우를 갖고 있는 이 전 부총리의 조언을 어느 때보다 정부당국자들이 새겨들을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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