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신문을 보고 있다. 검정색 양복 바지에 런닝 셔츠 훤히 비치는 흰 와이셔츠를 입은 중년의 남자. 그는 책상다리를 하고서 한 쪽 발을 만지작거리며 신문을 보고 있다. 한 남자가 자고 있다. 바로 옆 벤치에서. 런닝 셔츠 바람에 양복 바지를 장딴지까지 말아 올린 채 낮잠을 자고 있다. 비둘기들이 그 벤치 근처를 오락가락한다. 저만치 떨어진 또 다른 은행나무 벤치에는 젊은 남녀 한 쌍이 꼭 붙어 앉아 있다. 그들은 오직 두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낮은 소리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눈다. 가끔 여자의 웃는 모습이 보이긴 하지만 웃음 소리는 내가 앉아 있는 벤치까지는 들리지 않는다. 30대쯤 돼 보이는 한 남자가 그 8각형의 벤치 한 켠에 걸터앉아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거리고 있다.
어느 늦여름 날 오후.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마로니에 공원은 적막했다. 매미 소리는 땅속으로 잦아들었지만 햇살은 여전히 따가웠다. 햇살이 내리쬐는 공원 뜨락에는 한 무리의 비둘기들만이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 느릿느릿 걷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햇볕을 피해 다들 은행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8각형 벤치에 띄엄띄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옆 사람을 배려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오히려 타인으로부터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앉아 있는 듯 보였다.
문예진흥원 건물 위로 보이는 하늘은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가끔씩 은행잎 사이로 떨어지는 햇살이 나의 눈을 자극했다. 왼팔에 핸드백을 든 중년에 여성이 공원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난 그녀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며 그녀가 어디에 앉을 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내 짐작대로 아르코미술관 앞에 있는 빈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한 낮의 마로니에 공원은 그 누구라도 들어서는 순간 본능적으로 앉아야 할 곳을 알아차리는 것 같았다. 남을 방해하지 않고 또 내가 방해받지 않는 빈자리, 그곳이 그의 자리였다. 핸드백을 옆에 둔 채 그녀는 홀로 조용히 앉았다. 그저 벤치 근처를 배회하는 비둘기만 내려다보고 있을 뿐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 토닥토닥 비둘기가 걸어 다니고 있었다. 토닥 토닥....저만치 떨어져 있던 햇살이 어느새 그녀의 발에 걸려 있었다.
한 낮의 마로니에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결코 다른 사람들과 시선을 함께하지 않았다. 마치 누구와도 자신만의 세계를 공유하고 싶지 않은 듯 한쪽 사람이 왼쪽을 보고 앉아 있으면 옆 사람은 자연스럽게 등을 돌린 채 오른쪽을 향하고 있었다. 또 등을 돌리지 않고 앉아 있어도 이쪽 사람이 공원 마당의 비둘기를 보고 있으면 옆 사람은 은행잎 사이로 점점이 떨어지는 햇살을 세고 있었다. 은행나무는 그들에게 넓은 그늘을 하나씩 드리워 줬다. 가끔 파닥거리는 비둘기들의 날개 짓과 공원 옆을 할퀴듯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경적 소리만이 그 조용한 오후의 정적을 깰 뿐이었다. 늦여름 오후, 마로니에 공원에는 그렇게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 무거운 침묵에서 나는 우리 시대의 단상을 보았다. 조용한 오후, 시원한 그늘, 모처럼 맑은 하늘, 따뜻한 햇살. 영화에서처럼 밝은 파스텔 빛깔이 감도는 한 낮의 마로니에 공원은 여유로운 오후를 한가로이 즐길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마로니에 공원에 온 사람들의 표정은 영화에서 보던 것과는 달랐다.
미간을 찌푸린 채 신문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중년의 얼굴에서 나는 고달픈 이 시대 가장들의 걱정을 느꼈고, 풀어헤쳐진 모습으로 벤치에 누워있는 장년의 모습에서 나는, 치열한 경쟁에서 밀려 내일에 대한 희망 없이 팍팍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오정과 오륙도가 느끼는 밥벌이의 지겨움을 보았다. 또 물끄러미 비둘기만 쳐다보는 중년 여성의 모습에서 나는, 마음 붙일 곳 하나 없이 온갖 걱정을 홀로 삭히며 살아가는 이 시대 아줌마들의 어두운 그늘을 읽었다. 한 공간 안에 있지만 저마다 다른 고민과 걱정의 무게가 어쩌면 그들을 서로 다른 벤치와 서로 다른 시선의 형태로 그들을 단절시켜 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 역시, 멀찌감치 떨어진 벤치에 홀로 앉아 그들을 관찰하고 있었던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고민과 걱정을 안고 살아가는 또 다른 이방인이었다. N분의 1로 나뉘어진 공간 속, N분의 1 이방인.
| 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무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 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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