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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길이의 분노

버락 오바마가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국내에서도 자연스럽게 다문화 가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서울 송파구청이 결혼 이주여성들을 원어민 어학강사요원으로 선발, 운영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어서 잠실 쪽으로 취재를 다녀왔습니다.

결혼 이주여성이 유독 많은 송파구청은 지난달부터 송파구 관내에 있는 결혼 이민 여성(필리핀, 중국, 몽골, 미얀마…) 12명을 선발해 외국어 교수법 등을 가르친 뒤 각 동 주민센터로 강사 파견을 하고 있었습니다. 현재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시집 온 필리핀 출신의 록산 로렌조 씨와 역시 필리핀 출신의 판초 리메디오스 씨, 일본 출신의 요코야마 미카 씨가 인기강사 3인방으로 유명세를 톡톡히 타고 있다고 하더군요.

결혼 이주여성을 원어민 어학강사로 채용한 송파구청의 역발상도 관심이 갔지만, 저는 다문화 가정의 2세들이 한국 생활에 어떻게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그 생활이 더욱 궁금했습니다. 예전에 결혼 이주여성들을 취재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의 가장 큰 걱정은 다름 아닌 2세들의 육아, 교육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인터뷰에서 이주 여성들은 자신에 관한 질문에는 담담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도 아이들 이야기만 나오면 대부분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이번 취재에서 필리핀 출신 록산 씨의 아들을 어렵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올해 9살 김영길이라는 친구인데, 취재를 나갔을 때는 영길이는 한 복지관에서 개설한 태권도 수업에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왼쪽 어깨에 태극마크를 달고 열심히 운동하는 영길이는 한눈에 봐서는 다문화 가정 2세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냥 장난끼 많은 대한민국의 평범한 초등학생의 모습이었습니다.

태권도 수업을 마친 영길이를 잠깐 인터뷰했습니다. 길지 않은 인터뷰를 통해 영길이의 맘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분노를 쉽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영길이는 외국인 엄마가 영어 선생님으로 일하게 된 것은 자랑스러웠지만, 그런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엄마가 영어 선생님이기 때문에 자랑스러운 점 보다는, 엄마가 필리핀 사람이라 부끄러운 맘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영길이는 엄마 때문에 학교 생활에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습니다.

(학교 친구들에게 엄마 영어 선생님 됐다고 이야기했니?)

아니요. 안 했어요. 부끄러워서요.

(학교에선 친구들이랑 잘 지내니?)

이건 이야기하면 좀 곤란한데…. 화 나는 게 많아요.

(왜 화가 나는데?)

친구들이 놀리니까요. 이건 얘기하면 좀 그런데… 어쩔 수 없지…말을 하는 수밖에….

얼굴이 시커멓다고 계속 놀리고, 또 어떤 애는 아프리카라고 놀리고 모른 척하고 지나가요.

어떤 애는 사정없이 막 때리고요. 화가 났죠. 엄청 화가 났어요.


이제 겨우 초등학교 3학년인 아이의 맘에 이런 분노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 참 가슴 아팠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5만 8천 명의 결혼 이민자 자녀가 있습니다. 결혼 이민자 가구의 절반 이상(52%)이 최저 생계비 이하 소득 수준인데, 여기에 결혼 이민자 부모가 한국어에 익숙하지 못하기까지 하면 상당수의 이민자 자녀들은 학습 부진 문제를 겪게 된다고 합니다. 학습부진은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회 부적응 문제를 낳게 되죠. 행정안전부와 교육과학기술부의 자료를 보면 현재 중학교에 들어갈 결혼 이민자 자녀는 3천 6백 명인데 실제 취학한 청소년은 2천 2백 명뿐이고, 고등학교의 경우는 2천 5백 명 가운데 760명만 학교에 다닐 정도로 이들은 한국사회에 적응하지 못한채 낙오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현재 결혼 이민자 자녀의 90% 정도가 만 12살 미만인데, 이들이 본격적으로 사회에 진출하게 되는 10년 후쯤에는 빈곤, 소요 등의 사회적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어느새 우리 사회의 일원이 돼버린 결혼이민자들과 그 자녀들을 이제는 단순한 관리나 배려의 차원이 아니라 진짜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시점이 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결혼 이주여성을 원어민 강사로 떳떳하게 설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한 송파구청의 생각이 더욱 돋보이는 것 같습니다. 한국인에게나, 한국으로 이민을 온 사람들에게나 결국 최고의 복지는 일자리라는 생각이 새삼 느껴지는 날입니다.

 

[편집자주] '모든 답은 현장에 있다!' 성실한 취재로 생활밀착형 기사들을 많이 전해주는 이병희 기자는 사회1부에서 서울시청을 출입하고 있습니다.  2001년 입사해 사회부 사건팀과 기획취재팀, 정치부 등을 거친 이 기자는 지난 2002년에는 시장의 저가의류에 유명상표를 붙여 비싸게 되파는 시내 유명백화점의 실태를 심층고발해 큰 반향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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