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와 전파를 통해 보고 듣는 '경제 위기'라는 추상적인 용어가 "죽을 지경.." 내지는 "심상치 않다"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와 합쳐지며 추워지는 날씨를 의식하지 못할 만큼 매서운 기세로 몰아치는 것 같습니다. IMF때의 고통과 공포를 겪어본 학습효과가 이 위기를 더 가중시키는 요소라는 분석도 그럴듯해 보입니다. 마이너스 몇십프로라는 숫자는 알토란 같이 번 돈 불려보겠다고 시작한 펀드나 주식에서 쓰디쓴 손실을 본 서민들의 생채기이고, 갈수록 떨어지는 취업율이라는 숫자는 일자리를 찾는 젊은이들이 맛보는 끝이 보이지 않는 좌절과 고통입니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전문가들이 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방안을 제시해줘야 할텐데 백약이 무효라느니 하는 말이 들리는 것을 보면 환자의 병이 복합적이고 위중해서 그런 건지 진단과 처방을 내리는 의사가 무능해서 그런건지 잘 모르겠네요. 이럴때 한가하게 영화 이야기나 하는게 민망스러울 정도입니다. 어렵고 힘드신 분들께 가장 저렴한 문화생활인 영화 감상을 통해서나마 삶의 작은 위안거리라도 얻으시길 바란다는 말씀 드립니다.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감독: 민규동, 주연: 주지훈, 김재욱, 유아인, 최지호, 15세관람가)
민규동 감독이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이후 3년만에 내놓는 작품입니다. 복잡하게 직조된 여러 커플의 사랑이야기를 짜임새있게 풀어내며 흥행에 성공하며 한국판 [러브 액츄얼리]같다는 평가도 받았습니다. 이번 영화는 케이크 가게에 모인 다양한 네 남자의 이야기를 무난하게 풀어냈습니다. 특징은 이전 작품들에도 등장했던 동성애 코드가 보다 전면에 자연스럽게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재벌2세인 진혁(주지훈)은 단 것, 특히 케이크는 질색이지만 여자들이 많이 찾는다는 이유로 케이크 가게를 엽니다. 주방장으로 프랑스 유학파 천재 파티셰인 선우(김재욱)를 영입하는데 자칭타칭 한번만 보면 모든 남자들이 빠져버리는 ‘마성의 게이’입니다. 여기에 선우의 케이크 맛에 홀딱 반해버린 전직 권투선수 기범(유아인)이 견습생으로 들어오고 어린 시절부터 진혁을 도련님이라 부르며 호위하던 사설 경호원 수영(최지호)까지 합류하는데요.
전반부에는 보기만해도 침이 고이는 달콤한 케이크들의 향연과 케이크 가게 꾸려가기가 흥겹고 익살스럽게 펼쳐집니다. 후반부에는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상처들을 드러내며 각자의 방식으로 극복하고 찾아내는 과정이 펼쳐집니다. 어린시절 유괴당해 케이크를 강제로 먹었던 고통에 시달리는 진혁의 회상과 상상 장면은 매혹적인 공포영화처럼 펼쳐지고 네 인물들이 티격태격하는 장면은 만화적인 과장법으로 치장됐는데 이질적인 두 요소의 조합이 비교적 매끄럽습니다. 심각한 듯 하다가 곧바로 코믹 코드로 나가는 속도있는 전개 때문에 무거울 수 있는 사연들이 늘어지지 않는 등 요즘 젊은 관객들 취향에 맞을 것 같습니다.
또 화제가 되고 있는 동성애 부분은 동성애로 주변으로부터 상처받고 고뇌하는 심각한 시각이 아니라 주변에 존재하는 여러 설정들 중 하나 정도라는 입장으로 다뤄 그다지 거북하지 않게 받아들여집니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특별히 동성애자라고 성정체성에 혼동을 느끼며 사회의 편견에 시달리는 등 심각하게 생각해야하는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인 특성 차원으로 묘사했다고 밝히더군요. 게이 역을 맡은 김재욱이 예쁜 꽃미남의 용모에 역할 연구를 충실하게 준비해 보여준데 기인한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저는 진지한 키스 장면에서 좀 징그럽고 닭살돋는 느낌 빼고는 별 거부감이 들지 않더군요.
주인공 가운데에서도 핵심인물인 주지훈은 코믹함과 심각함을 오가는 진폭이 큰 연기를 무난하게 소화하는데 코믹함을 표현하는 장면에서는 만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이 생생하고 자연스럽습니다. 조연으로 등장하는 김창완과 이휘향의 안정된 연기도 돋보이고 네명의 남자 주인공들도 제몫을 해내는데 특히 유아인이라는 배우가 눈에 띄더군요. 곱상한 얼굴 속에 잠재된 능력이랄까 끼가 많아 보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 문제없이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속에 숨겨진 상처와 아픔이 있는데 요즘은 이런 속사정을 털어놓기도 어렵고 알아채기도 어렵다는 것, 그 속에서 각자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과 속사정 모르는 주변 사람들이더라도 따뜻한 눈길만 있으면 그럭저럭 살만하다는 것을 느껴보라는 것이 주제라면 주제랄 수 있겠습니다.
미인도(감독: 전윤수, 주연:김민선, 김영호, 김남길, 청소년 관람불가)
소설에서 시작한 신윤복의 인기는 드라마 [바람의 화원] 덕분에 신드롬으로 확대됐고, 그의 작품이 전시되는 간송미술관에는 예년보다 서너배 많은 관람객들로 미어터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전통 그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좋은데 관람객들 대다수가 그림 앞에서 "신윤복이 여자였다며?"하는 멘트만 날린다는 점은 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영화 [미인도]는 그림을 위해 남장여자로 설정하고 정체성에 갈등한다는 점에서는 [바람의 화원]과 대동소이 합니다. 영화 자체로만 놓고 본다면 화면도 좋고 사극답지 않게 속도감있게 전개되는데다 드라마에서는 절대 보여줄 수 없는 진한 수위의 노출까지 곁들여져 볼만한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요. 자꾸 드라마의 문근영과 영화의 김민선이 비교되면서 그 아우라나 포스의 강도 측면에서 드라마가 영화를 압도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네요. 또 속도감 때문에 주인공의 고뇌와 인물들 사이의 갈등이 깊이있게 다뤄지지 못하면서 감정이입에 애로사항이 있다는 단점이 발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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