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영화계는 2000년대 들어 1천만명이라는 믿기지 않는 관객수를 기록한 영화를 4편이나 배출했고 한국영화 점유율이 60% 이상으로 치솟을 정도로 황금기를 누렸다.
그러나 2006년 스크린쿼터가 축소된 이후 극장을 찾는 관객이 크게 줄어들었고, 한국영화의 불안정한 수익구조와 맞물려 침체를 겪기 시작했다.
여기에 충무로의 위기는 최근 국내외적인 경기 악화의 타격까지 받으면서 투자·제작에서 난항을 겪으며 더욱 표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수익률 악화에 따른 투자·제작 난항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올 1~10월 영화산업결산에 따르면 이월작과 재개봉작을 제외한 한국영화 개봉작 수는 1년 전보다 1편 줄어든 89편이다. 한국영화 활황기 막바지인 2006년과 지난해 초까지 제작돼 대기 중이던 수 많은 '창고 영화'들을 대거 개봉해 개봉편수는 대충 유지했다.
그러나 이 기간 한국영화를 본 관객(서울 기준)은 지난해 1천800만명에서 1천500만명으로 14.9% 줄어들었다. 지난해에도 이미 2006년보다 22.6% 급감한 상태에서 관객들이 더 줄어든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수익률 악화다. 지난해 개봉한 한국영화 10편 가운데 적자를 낸 영화가 9편이었다는 것은 한국영화의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올해 통계는 아직 나오지 않았으나 올해 관객수 200만명을 넘긴 영화가 고작 6편 뿐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나머지 수많은 영화들의 적자 폭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한다는 위기감이 높아지면 시장에서 돈이 말라 가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올해 제작되거나 제작 중인 영화가 대폭 줄어 당장 내년에는 극장에 가서 볼만한 한국영화가 눈에 띄게 줄어들 것이 뻔하다는 게 영화계의 전망이다.
영진위는 10월 말 '한국영화산업 활성화 단기대책'을 발표하면서 수익성 악화로 투자 관망상태가 장기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영진위가 추산한 올해 영화 제작 편수는 전년 대비 40% 감소한 40편 정도다.
강한섭 영진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적정 편수에 대한 의견으로는 50편도 있고 60~70편도 있으며 2006, 2007년의 100편 이상도 가능하겠지만 영진위는 60여 편으로 파악했다"며 "그러나 현재 40편에도 못 미친다는 위기감이 있다"고 말했다.
◇국내외 경기 악화로 어려움 가중
투자 난항과 더불어 경기 침체, 치솟는 환율의 여파로 그나마 기획 중 또는 제작 중이던 작품들이 멈춰서면서 한국영화의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하고 있다.
최근 영화 '29년'의 제작이 투자유치 부진으로 무기한 연기됐다. 김아중, 류승범이라는 스타 캐스팅, 인기 만화가 강풀의 탄탄한 원작, 중견 제작사 청어람의 뒷받침, '천하장사 마돈나'로 호평받은 이해영 감독의 연출력이 있었지만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민감한 소재로 시장 불황까지 헤쳐나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너는 내 운명', '그놈 목소리'로 흥행에 성공한 박진표 감독의 신작 멜로영화 '내 사랑 내 곁에'는 캐스팅 단계에서 위기를 겪었다. 한류스타 권상우가 출연하기로 했지만 "투자ㆍ배급의 불확실함" 때문에 망설이다가 제작사와 불협화음을 겪은 끝에 캐스팅이 무산됐다.
외국과 합작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거나 해외 로케이션 촬영을 계획하고 있는 제작사들 역시 고환율에 직격탄을 맞고 주춤하고 있다.
영화사 스튜디오2.0의 경우 일본 로케이션으로 제작될 영화 '사라쿠'를 내년 초 크랭크인할 계획이었지만 이 역시 '당분간 보류' 상태가 됐다. 제작 예산은 60억원 가량이었지만 환율 상승으로 제작비가 90억원 이상으로 뛰자 스튜디오2.0은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일본 투자자를 확보한 뒤 촬영을 하기로 계획을 바꿨다.
◇다양한 자구노력, 타개책 될까
투자·제작 위축을 타개하려는 영화계의 노력은 "웬만한 것은 다 하고 있다"고 입을 모을 정도로 전방위적이다.
가장 큰 인식은 기획만이 살 길이라는 것. 기획 단계에서부터 제작비 예산을 줄여 투자 위험을 낮추려는 시도는 여러 차례 성공을 거뒀다. '영화는 영화다'와 '고사-피의 중간고사'처럼 보통의 상업영화보다 훨씬 적은 10억원 안팎의 예산으로 만들고도 대규모 개봉해 흥행에 성공한 사례다.
배우들이 개런티를 대폭 낮추거나 아예 받지 않는 사례가 늘었고 심지어 영화 제작비 일부를 투자하는 경우도 부쩍 많아졌다.
시장을 넓히기 위한 시도도 이뤄지고 있다. '삼국지-용의 부활', '보트', '구구는 고양이다', '소피의 복수' 등은 다른 나라 투자를 유치해 공동제작을 하거나 해외 영화에 투자한 사례다.
극장 안팎에서도 관객을 끌어모아 수익성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칸 국제영화제 버전을 상영하고, '신기전'이 유료 시사를 확대한 것 등이다.
극장 밖에서 돈을 벌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웹하드에서 영화를 합법적으로 내려받을 수 있는 씨네21i의 서비스가 올 초 시작돼, 2개월 만에 이용자수 30만명을 돌파했으며 국내에서 처음 제작된 IPTV 영화 4편이 이번 달에 공개된다. 케이블 영화채널의 공동 투자를 받아 일찌감치 판로를 다진 '초감각 커플' 같은 영화도 있다.
이에 더해 영진위는 최근 투자 경색을 해소하기 위해 800억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여러 자구책들로 한국영화가 양질의 작품들로 관객의 신뢰를 되찾고 오랜 불황의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 영화인들은 물론 관객들도 지켜보고 있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