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여의도 박 반장] 희망주는 정치는 언제쯤?

오늘 낮 점심을 먹고 나오다, 잔뜩 더러워진 구두를 더 이상 방치하기 어려워 구두방에 들렀습니다. 살가운 인사를 건넨 구두방 아저씨는 뭔지 모를 음률을 흥얼거리며 구두들을 열심히 닦고 있었습니다.

- 아저씨 기분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 요즘 같은 불경기에 기분 좋을 일이 어딨겠어요. 그렇다고 하루 종일 울상 짓고 있어봤자 뭐하겠습니까? 저만 손해죠.

- 경기가 많이 어렵죠?

= 죽지 못해 사는거죠. 그래도 전 할 일이 있으니 좀 낫지요. 일이 없어 괴로운 사람들 얼마나 많습니까...

참 건강한 분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진 말이 귀가를 세게 두드렸습니다.

= 경제란 게 말이죠. 돌고 도는 거예요. 이런 게 가끔씩은 와줘야 해요. 그래야 없는 사람도 희망이 생기는 거 아니겠어요?

- 그게 무슨 얘기세요?

= 주식도 곤두박질치고 집값도 폭락하고, 은행 이자도 올라주고.. 뭐 이런 게 있어줘야 가진 사람들도 좀 망해주고, 없이 사는 사람들도 어떻게 돈도 좀 벌 수 있고 뭐.. 그런 거잖아요. IMF때도 카드 대란때도 다 그랬잖아요... 혹시 알아요. 저도 이번 기회에 좀 부자가 될런지..

웃으면서 하는 말이었지만, 뭔가 깊은 절망감이 느껴졌습니다. 정상적인 경제상황에서는 절대로 더 나은 삶으로 나갈 수 없다는 체념이 배어 있는 듯 했습니다.

- 국회 앞에서 일하시는데, 요즘 정치 보시면 어때요?

= (한번 쳐다보더니) 국회에서 일하세요?

- 아니오, 그냥 궁금해서요.

= 저 사람들이 뭘 하든 저는 아--무 관심 없습니다.

- 왜요? 싸움만 해대서요?

= 뭐 싸우는 것까지는 좋은데... 제발 국민 위해서 뭘 한다니 하는 소리나 안했으면 좋겠어요... (구두를 건네며) 자.. 여기 있습니다.

우리의 짧은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습니다. 국회 기자실로 돌아오는 동안 이 아저씨의 두 마디가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이런 경제난을 인생 역전의 기회(?)로 여길 만큼 빡빡한 인생살이와 국회의원들이 '국민을 위해서'라는 포장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불만 가득한 불신이 그것이었습니다. 너무 과장해서 해석한 건지는 몰라도, 전자는 '사회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일 것이요, 후자는 '국가에 대한 믿음의 상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회 기자로서 여야의 공방 한가운데 서 있다 보면 스스로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쉽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어떤 정책에 대해 여야가 갑론을박 할 때면 그 정책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대해 예단을 내리기가 어려울 경우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건 아닌데 하고 명확히 판단이 내려질 때가 더 많은 곳이 국횝니다. 전 정권이 잘못과 현 정권의 잘못을 놓고 싸우는 모습.. 이성을 잃고 상대를 향해 던지는 저주에 가까운 막말들.. 국민을 이해하고 섬기겠다면서도 국민을 속이고 국민을 우습게 아는 권위의식들.... 우리 국회가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국민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이유들입니다.

이번에 국회에 입성한 한 초선의원과 잠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던 중 그에게서도 비슷한 고민을 들었습니다.

- 국회에 들어와 보니 어떠세요?

= 아주 무기력함을 느낍니다.

- 그게 무슨 말이세요?

= 어차피 초선이 뭘 할 수 있겠나 싶긴 했지만 막상 들어와서 보니 제 스스로조차 추스르지 못할 때가 많아요. 이건 아닌데 싶은데도 당의 방침을 따라가야 하고, 지역구 챙기다 보니까 제대로 공부도 않고 시키는 대로 하는 거수기가 되는 느낌도 들고.... 싸움질 절대 하지 말아야지 하고 들어왔는데 그러지도 못하고.... 정말 정치 시작하면서 국민을 위해서 일 해보고픈 생각이었는데, 이제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내가 정말 국민을 위하고 있나하고 자문해 볼 때가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요.

아주 건강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런 초심이 오래도록 계속됐으면 하는 바람도 들었습니다. 정치는 권력을 향한 싸움입니다. 때문에 '국민을 위해서'라는 말은 이런 정치의 속성을 감싸는 외피일 뿐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외피가 본질이 될 수 있게 할 수 있는 힘은 '투표'를 통해 발휘되는 국민의 평가일 겁니다. 우리 정치가 국민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서는 안 될 이유이기도 합니다. 각 당이 국민의 여론조사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인류 역사상 정치가 시민사회로부터 환영받았던 때는 그리 많지 않았던 듯 합니다. 시민사회를 늘 간섭하고 방해하는 존재로 인식되기 일쑤였습니다. 정치 즉 국가는 시민사회의 계급적 대립구조를 감추거나 억제하는 기제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정치는 시민사회의 힘에 의해 바뀐 사례도 부지기수입니다. 폭압적인 권력은 시민사회의 저항에 여지없이 무너졌고, 권모술수로 포장된 교만한 정치는 시민사회의 선택에 의해 생사가 뒤바뀐 전례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구두방 아저씨의 한탄이 뒤엉킨 말 처럼,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이 정상적인 구조 속에서는 신분을 뒤바꾸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또, 국민을 위한다면서 그러하지 못한 우리 정치가 아무런 계기 없이 어느 순간 저절로 바뀔 일도 없을 겁니다.

그러나 바꿔 생각하면, 우리 정치가 희망을 주는 정치가 될 수 있도록 우리가 늘 감시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국민을 위한다' 면서 국민을 속이거나 국민을 무시하는 정치를 막아내야 하는 의무와 권리가 우리 국민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더디지만 우리 정치도 서서히 좋아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만들었던 것도 정치를 싫어하고 정치에 무관심하다면서도 때마다 정당한 심판을 가하는 우리 국민들의 냉엄한 평가와 판단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 정치가 진정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그날이 올 것이라고 기대해 볼 만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일 겁니다.

 

[편집자주] 10년전 '출동 코끼리 기자' 또 '박병일 기자의 현장출동!' 등에서 맹렬하고 거침없는 시사고발 취재로 이름을 날렸던 박병일 기자는 현재 차장이 되어 정치부 여당팀의 현장팀장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에 이제는 연륜까지 더해진 깊이있는 정치 기사가 기대됩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많이 본 뉴스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댓글

    방금 달린 댓글
    댓글 작성
    첫 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0 / 300

    댓글 ∙ 답글 수 0
    • 최신순
    • 공감순
    • 비공감순
    매너봇 이미지
    매너봇이 작동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