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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하루 - 오디세이를 쓰고 풍경화를 그리다

멋진 하루(감독: 이윤기, 주연: 하정우, 전도연, 12세 관람가)

'여자, 정혜'라는 장편 데뷔작에서 신인답지 않은 탄탄한 구성과 섬세함을 보여줬던 이윤기 감독이 각각 연기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하정우, 전도연 두 배우를 데리고 찍는 영화라고 해서 관심이 많았습니다.

나이 서른을 갓 넘긴 희수(전도연)는 다니던 직장을 관둔 뒤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박봉의 비정규직은 알량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고민하며 백수생활을 이어나가던 차에 1년 전 헤어졌던 남자 친구 병운(하정우)에게 빌려줬던 350만 원을 돌려받기 위해 장외 경마장에 죽치고 있는 병운을 찾아갑니다. 넉살 좋게 반가워하는 병운에게 희수는 차용증을 들이밀며 당장 오늘 중으로 갚으라고 채근하자 잠시 난감해하던 병운은 지금은 수중에 돈이 없으니 아는 사람들을 수소문해 조금씩 빌려 갚겠다고 하고 희수는 그런 병운과 함께 하루 동안 서울 곳곳을 누비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중년의 여성 사업가, 잘 나가는 술집 여자, 이혼하고 마트에서 일하며 딸을 혼자 키우는 병운의 동창생 친구 등 다양한 사람들은 희수를 동정하기도 하고 경멸하기도 합니다. 이상한 점은 요즘같이 각박한 세상에 그 사람들이 죄다 병운에게 선뜻 돈을 빌려준다는 점이지요. 병운의 캐릭터도 이상합니다. 우유부단하고 한없이 착해보이고 때로는 비굴하고 남을 너무 배려 잘하는 남자인데 이상하게 끌리는 구석이 있습니다. (영화는 영화일뿐 현실에서 이런 남자 만나서 정주면 안 좋을 것 같다는...)

감독은 하루 동안 주인공들이 들르는 서울의 구석구석과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이 시대 이 곳에 살고 있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에 대한 풍경화를 그려냅니다. 두 남녀의 심리묘사가 탁월하고 심리 변화의 진행도 자연스럽습니다. 서울 오디세이라고 할 수 있는 여정을 통해 희수는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새로운 힘을 얻고, 말 많고 사람 좋지만 무책임한 전 남자친구 병운의 매력도 살짝 느낍니다. 하지만 관습적인 기대에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쿨하게 영화를 결말짓습니다.

희수의 차가 견인당해 찾으러 가는 전철안의 대화나 정학 맞은 조카뻘 되는 여자아이를 데리러간 학교에서 여자아이를 도와 희수가 바닥의 껌을 떼는 장면은 강요 없이 희수의 심리상태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듯 한 바이크 족들이 모여 있는 옥탑방 바베큐 파티 장면에서 남자 세 명이 좁은 통로 노곤한 포즈로 죽치고 앉아 하릴없이 해바라기를 하고 있고 희수가 그곳으로 내려와 어색하게 합석하는 장면이 제일 마음에 들더군요. 술집여자 집에서 나오다가 마주친 병운 여자후배 커플과 카페에서 어색한 회합 장면은 개그프로의 한 코너처럼 제일 재미있었구요. 중간 중간 나오는 유머에 폭소가 터지지는 않지만 피식 피식 헛웃음이 나올 정도인데 유머를 포함한 대사들이 배우들 입에 달라붙으며 나오니 현실감 있고 다채롭습니다.

'밀양'에서 강렬한 연기로 칸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전도연이 부담감에 시달리며 선택한 '멋진 하루'는 멋진 선택이라 생각됩니다. 힘은 빼고 평범하지만 섬세한 연기를 안정감 있게 선보이며 독특한 개성을 뿜는 상대 배우의 연기를 잘 받아줍니다. 하정우는 이제 연기에 물이 오를 대로 오른 것 같습니다. 찬바람 부는 가을에 그동안 무뎌졌던 감성의 감각기관들을 다시 깨우는데 효과가 클 듯한 잔잔하면서 섬세하고 잔재미까지 갖춘 수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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