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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 말도 믿을 수 없다면..' 중동 특파원의 비애

오늘 아침 뉴스에서 본의 아니게 오보를 하고 말았습니다.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 소식 접하셨겠지만 독일과 이탈리아인 등 외국인 관광객 11명과 현지인 여행사 직원 등 일행 18명이 지난 금요일 이집트와 수단 국경근처에서 사막여행을 하던 도중 무장괴한에게 납치돼 수단으로 끌려갔습니다.

여행에 동행했던 여행사 사장이 자신의 아내에게 위성전화를 걸어오면서 피랍 사실이 어젯밤 뒤늦게 알려졌고 저 역시 아침뉴스로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기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시각으로 오늘(23일) 새벽 5시쯤, 그러니까 뉴스 시작 1시간을 남기고, 유엔총회 참석차 뉴욕을 방문중이던 이집트 외무장관이 기자들 앞에서 외국인 관광객 일행이 전원 무사히 석방됐다고 말했다는 소식이 외신으로 전해졌습니다.

외무장관 말이기에 저는 일말의 의심도 없이 피랍 전말을 전하려던 리포트를 취소하고 부랴부랴 석방 소식을 앞세운 기사로 내용을 고쳐 아침뉴스에 보도했습니다. 그런데 한 숨 자고 (카이로는 서울과 7시간 시차) 사무실로 출근해 알 자지라를 비롯한 외신들을 확인하니 이게 웬일입니까? 관광객들은 여전히 수단에 억류돼 있고 납치범들은 몸값을 올려가며 여전히 협상중이라는 보도가 나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잠시 뒤 이집트 정부마저 외무장관의 발언은 잘못된 정보에 따른 섣부른 발표였다고 공식 확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몸값 협상이 채 끝나기도 전에 피랍 관광객들이 곧 풀려날 것 같다는 부하직원들의 보고를 토대로 이집트 외무장관이 경솔하게 석방됐다고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자들의 추궁성 질문이 이어지자 "잘 해결될 것"이라는 데서 그쳤어야 할 것을 몇 걸음이나 더 나아가 아랍인 특유의 허풍과 과장이 가미돼 장관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섣부른 발언이 나온 게 아닌가 추정됩니다.

어쨌든 명색이 카이로 특파원으로서 주재국과 이웃 나라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어이없게도 오보를 전하게 된 점 몹시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국의 장관이 기자들 앞에서 발표한 내용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앞으로가 더욱 걱정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중동 국가들 대부분은 우리 유신 때를 연상케 할 만큼 정보 통제와 언론 활동에 대한 제약이 심합니다.

당국자와의 전화 연결은 거의 생각도 못할 정도이고, 거리에서 일상적인 촬영을 하려고 해도 관할 경찰서와 프레스센터로부터 보름에서 3주 정도 전에 허가서를 얻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국가 이미지에 저해가 될 수 있는 소재인 경우 취재 허가를 얻기는 커녕 요주의 리스트에 올라 감시 대상이 될 뿐입니다.

정부 발표를 믿고 보도하자니 오보의 가능성이 상존하고, 확인할 방법도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정부의 발표를 매번 의심하자니 보도 타이밍을 놓칠 수 밖에 없고...  진퇴양난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듯 합니다.

  [편집자주] 한국 언론을 대표하는 종군기자 가운데 한사람인 이민주 기자는 1995년 SBS 공채로 입사해 스포츠, 사회부, 경제부 등을 거쳐 2008년 7월부터는 이집트 카이로 특파원으로 활약 중입니다. 오랜 중동지역 취재경험과 연수 경력으로 2001년 아프간전 당시에는 미항모 키티호크 동승취재, 2003년 이라크전 때는 바그다드 현지취재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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