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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박 반장] 한밤의 코미디

참으로 코미디 같은 일이 우리 국회에서 일어났습니다. 바로 어제(12일) 새벽에 말이죠. 172명의 거대 공룡 여당이 마음만 먹으면 못 할 일이 없을 터인데, 원내지도부의 미숙한 일 처리와 의원들의 안이함이 한편의 각본없는 코미디를 연출했습니다. 이미 방송을 통해서 내용을 전해 들으셨겠지만 조금 상세히 설명을 해 드려야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어 정리해 봅니다.

9월 11일은 여야가 추경안을 처리하기로 합의했던 시한입니다.  여야는 그러나 4조 9천억 원 규모의 정부 추경예산안을 놓고 몇일째 줄다리기를 벌이고도 끝내 한전과 가스공사 지원금 1조 2천 5백억 원의 삭감 여부를 놓고 쟁점 타결에 실패했습니다. 정부여당은 더 이상 추경안 처리를 미룰 경우 전기료와 가스료의 추가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이유로 강행처리에 나서기로 결심합니다. 충분히 명분이 있는 만큼 강행처리를 하더라도 여론의 질타를 피할수 있다고 판단한 거죠. 선진당도 돕기로 했으니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코미디는 그 다음부터 시작됩니다. 코미디 전개의 이해를 돕기 위해 우선 추경안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를 설명드려야겠네요. 먼저 국회 예결위에서 처리해야 하는데 재적위원의 과반수가 필요합니다. 예결위의 전체 인원은 50명. 이가운데 한나라당은 위원장(이한구 한나라당 의원)을 빼고도 28명이 있는 만큼 맘만 먹으면 선진당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의결정족수인 26명이 넘어 처리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28명 가운데, 7명이나 지역구 행사를 이유로 자리를 비워버린 거죠. 남아있던 한나라당 의원이 21명.. 그러다보니 의결에 필요한 26명에서 5명이나 모자랐습니다. 선진당 의원등까지 동원해도 25명.. 딱 1명이 모자른 상황이 발생한 겁니다. 한나라당에게 비극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또 한가지 처리 절차상의 이해를 돕기위해 사보임이라는 국회제도를 설명드려야겠네요. 국회의원이 불가피한 이유로 결석하게 될 경우 각 교섭단체는 다른 상임위에 소속된 의원으로 교체할수 있습니다. 이를 사보임이라고 합니다. 이 사보임 절차는 각교섭단체 대표가 국회 사무처에 사임할 의원과 보임할 의원을 적은 신청서를 접수하게 됩니다. 국회 직원은 이 서류를 국회의장에게 전해 의장의 결재를 받은뒤에야 사보임이 확정됩니다.

한밤 코미디의 절정은 이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는 결석의원 가운데 한명인 황영철 의원 대신 박준선 원내부대표를 보임시키기로 하고 서류를 접수하게 했습니다. 이때 시각이 어제 새벽 0시 5분. 접수를 받은 국회 직원은 앞서 설명한 국회법 절차를 몰랐던지 "사보임이 됐습니다"라고 한나라당측에 설명했고, 한나라당은 곧바로 예결위 강행처리에 나섭니다. 당시 예결위 회의장에는 이미 민주당 의원들이 퇴장한 뒤였던 만큼 아무런 이의없이 추경안은 통과됐습니다. 이한구 예결특위 의장이 처리 선언을 한 시각은 0시 7분이었습니다.

이제 남은 절차는 국회 본회의에 상정해 통과시키면 됩니다. 그런데 민주당이 사보임 절차가 잘못된 사실을 발견해냈습니다. 한나라당이 요청한 사보임이 국회의장의 결재를 받은 시각이 1시 32분.. 다시 말해서 사보임절차가 완료(1시 32분)되기도 전에 국회 예결위에서 처리(1시 7분)됐으니 원천 무효라는 것입니다. 한나라당은 허탈했지만 시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코미디의 클라이 막스가 완성되는 대목입니다.

한나라당이 차선책을 택하기로 한 것이 바로 이땝니다. 코미디의 라스트 신이 시작되는 대목입니다. 한나라당으로서는 어차피 강행처리를 시도했던 것인 만큼 이날 한 방에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야당이 날치기니 뭐니 공격해대도 "민생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밀고 나갈수 있으려면 이날 강행처리작업을 모두 끝내야 한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또다른 비극이 시작됐습니다.

우선 첫번째로 고려할수 있는 방법은 예결위를 다시 열어 추경안을 처리하는 방법인데 이 방법은 쓸수가 없습니다. 예결위는 하루에 두 번 열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거대여당측이 산회를 선포해서 야당이 방심하게 한뒤 여당만 모여서 안건을 날치기 처리하는 관행을 막기 위해서죠. 결국 예결위를 통과시킨 시각이 새벽 0시 7분이니까 어제 하루동안은 예결위를 다시 열수 없게된 겁니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한가지. 국회의장이 직권 상정하게 하는 거죠.

의장의 직권 상정은 특정 정당의 반발로 안건처리가 지나치게 지연되는 경우를 막기위해 국회의장이 직권으로 본회의에 안건을 상정해서 처리할수 있게 한 국회법상에 규정된 절차입니다. 한나라당으로서는 마지막 희망(?)인 셈입니다. 국회의장은 국회법에 따라 의장에 당선된뒤 탈당은 했지만 과거 한나라당 소속 의원입니다. 한나라당은 충분히 승산있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그런데 김형오 국회의장은 완강했습니다. 한 정당의 요청만으로는 직권 상정을 할수 없다고 반대했습니다. 야당이나 국민들으로부터 날치기 처리를 했다는 비난을 받을수 없다는 판단이 있었을 겁니다. 한나라당은 선진당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둘이 같이 가서 직권상정을 요청하면 김형오 의장이 받아줄거라는 거지요. 그러나 선진당은 거부했습니다. 직권상정을 하면 표결에는 참여해주겠지만 굳이 앞에 총대 메고 함께 나서지는 않겠다는 거지요. 한나라당 원내대표단이 국회의장을 2시간 넘게 설득하는 동안 본회의장에서 졸면서 기다리고 있던 한나라당 의원들이 하나둘씩 지쳐서 본회의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김형오 국회의장이 본회의장 대기 의원들을 세어 보라고 지시했더니 130명 정도.. 김 의장은 한나라당의 거듭된 요청에 대해 "의결정족수인 150명도 넘지 못하는 상황에서 직권상정을 할수 없다"며 끝내 직권상정을 거부했습니다. 이 시각이 3시 40분쯤..

결국 한나라당은 강행처리를 포기하기로 하고 새벽 4시쯤 긴급의원총회를 소집했습니다. 의원들에게 밤사이 일어난 경과를 설명하던 홍준표 원내대표는 사태의 책임을 지겠다며 사의를 표명했습니다. 박희태 대표 등 당 지도부는 정기국회 초반에 선장을 바꿀수 없다며 사태진화에 나섰지만 당 내에선 과반수를 훨씬 넘는 172명의 의원을 갖고도 18대 국회 첫 강행처리조차 성공시키지 못한 원내지도부에 대한 불만과 질타가 불거져 나왔습니다. 홍준표 원내대표는 어제하루 외부와 연락을 끊었습니다.

민주당은 쾌재를 불렀습니다. 83명이라는 소수 야당의 무기력함을 늘 서럽게 느껴왔던 터에 거대여당의 실수가 자중지란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죠. 사실상 민주당은 어제 예결위 회의장을 떠나면서 날치기 처리를 은근히 유도한 측면도 있고, 사실상 추경안 처리를 눈감아 주겠다는 측면도 엿보입니다. 그런데 여당이 덜컥 코미디같은 실수로 강행처리조차 실패했으니 한마디로 뜻밖의 횡재를 한 셈이었던 거죠. 추경안도 처리못하고 날치기를 강행했다는 야당의 공격만 받는 어이없는 일을 여당은 어제 하루종일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어제 새벽 국회에서 일어난 일을 비교적 소상히 전해드렸습니다. 통상 TV뉴스 한 아이템이 1분 40초정도 하는데, 저희 SBS는 어제 3꼭지의 아이템을 통해 이런 국회 상황과 향후 전망을 비교적 상세히 전해드렸지만 국회법에 대한 절차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일부 시청자들로서는 "도대체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났지?"하는 의구심을 가지실까 생각돼 정리해 드렸습니다.

여당은 다음주에 다시 추경안 처리를 시도할 방침입니다. 한번 사의를 표명하고 당내 일부 비판을 받은 홍준표 원내대표는 제가 보기엔 일단 재신임을 받은 뒤 정기국회를 계속 이끌어 갈 것으로 보입니다. 또, 야당이 추경안의 원점 재검토를 주장하고 있으니 또 한번 선진당과 함께 강행처리가 불가피해 보입니다. 한번 코미디 같은 비극을 겪은 한나라당으로서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겠죠, 따라서 다음주에 추경안은 처리될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민생을 내걸고 거듭 강행처리를 시도하는 것인 만큼 추경안 처리에 따른 실제적 경제회복이 뒤따르지 않으면 더 큰 부담을 안게 된다는 점 또한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편집자주] 10년전 '출동 코끼리 기자' 또 '박병일 기자의 현장출동!' 등에서 맹렬하고 거침없는 시사고발 취재로 이름을 날렸던 박병일 기자는 현재 차장이 되어 정치부 여당팀의 현장팀장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에 이제는 연륜까지 더해진 깊이있는 정치 기사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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