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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먼 곳에-멜로 아닌 멜로

2년 전쯤 이준익 감독이 구상하고 있다는 [님은 먼 곳에]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코미디와 액션, 그리고 음악이 적절히 섞인 전쟁 멜로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박한 시골여인이 3대 독자 남편을 만나 씨를 받으려고 위문공연단 가수로 변신해 전쟁터로 간다.'는 한줄 정리에서 그런 유추가 쉽게 나왔거든요.

 하지만 직접 영화를 보고난 지금은 멜로도 있고 전쟁도 있고 음악도 있지만 멜로드라마도 아니고 전쟁 영화도 아니고 음악영화도 아닌, 장르라는 이름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특정 장르의 틀 안에 놓여있지 않은 영화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렇게 바라보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감독의 제작의도 가운데 가장 큰 목적이 '베트남전 다시 들여다보기'이고 그 주제를 감싸는 외피로 선택한 것이 멜로와 전쟁, 음악이라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순이(수애)는 3대 독자인 남편 상길(엄태웅)과 결혼한 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상길은 서울에서 만난 애인이 따로 있고 순이와 결혼한 뒤 도망치듯 군에 입대합니다. 시어머니는 대를 이을 혈통을 만들기 위해 매달 순이를 면회 보내지만 남편은 순이에게 따뜻한 눈길한번 주지 않습니다. 상길은 군대에서 사고를 치고 처벌 대신 베트남전에 참전하게 됩니다. 무심한 남편인 상길은 그 소식을 순이에게 알릴리가 없죠. 시어머니의 숨 막히는 타박에 친정으로 향했지만 친정에서는 '그 집 귀신이 되어야지 이 집에 한발자국도 못 들여놓는다.'는 아버지의 박대를 받습니다. 처지가 애매하게 된 순이는 베트남 행을 결심하고 양아치 밴드리더 정만(정진영)의 팀에 초짜 가수로 합류해 파병 장병들과 함께 배에 오릅니다.

이전 작품들에서 남자들만 등장시키고 여자 주인공이 왜 없냐는 질문에 이 감독은 자신이 여자를 잘 모르고 잘 아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그렸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번 영화는 여주인공이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남자들이 거창한 명분을 갖다 붙이고 저지르는 전쟁이 얼마나 비이성적이고 어리석은 짓인지 꾸짖으려면 여성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여자 같지 않게 고전적이고 단아한 외모를 지닌 수애는 이상적인 여인상을 도드라지게 보여줍니다. 수줍은 시골 아낙에서 짧은 치마를 입고 수백 명의 장병들 앞에서 춤추며 노래하는 가수로 변신하는 모습이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녀가 남자들 앞에 속살을 드러내 보이는, 당시 평범한 여성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모욕까지 무릅쓰고 호이 안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는 남편에게 왜 가려하는지 이유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극중 용득(정경호)이  관객들을 대신해 '왜 그렇게 가려하는가'하는 질문에 순이는 그저 살짝 미소를 띨 뿐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피어나는 애틋한 님을 위한 사랑' 식의 절절한 멜로드라마나 사회적 차별 속에서 평범한 여성이 노래를 통해 자아를 찾는다는 식의 여성 성장영화 였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지만 감독은 타협을 거부하고 애매함이라는 안개 속에 놓인 주인공 순이를 그냥 그대로 놔둡니다. 처세의 달인 정만이 이끄는 밴드 동료들과 함께 밥먹고 잠자고 이동하는 동안 순이는 마치 '4차원 소녀'처럼 함께 있지만 동떨어져 있습니다. 죽음의 공포 속에 극도로 억눌린 성적 욕망이 넘실대는 장병들 속에서 순이는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서 여자라기보다는 보편적 사랑을 갖고 있는 모성성의 여자로 자리매김 되어 관객들이 기이하게 받아들일 여지를 제공합니다. 반면 이렇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던 순이가 마지막 장면에서 점점 미쳐가는 눈빛으로 전쟁터를 헤메던 남편에게 보여주는 행위가 명료하고 강렬하게 받아들여지게 만드는 작용을 합니다. 

      

 

 할리우드 전쟁영화 촬영장소로 자주 제공되는 태국 현지 로케이션으로 찍은 전쟁 장면은 제작비 아끼려고 대충 찍는 바람에 화면 때깔이 별로라는 이야기를 들어온 감독답지 않게 대규모 물량과 스케일을 자랑합니다. '님은 먼 곳에', '늦기 전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대니보이', '수지Q' 같은 음악들은 적재적소에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이야기 전개의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중성적이면서 거친 듯한 수애의 목소리로 듣는 노래들은 김추자의 것과는 또다른 독특한 맛을 냅니다.  영화의 핵심 주제는 순이 일행이 베트콩에 잡힌 뒤 심문하는 과정에서 정만과 베트콩 대장과의 대화에 압축되어 담겨 있습니다.

 '공산당의 적화 야욕을 차단하는데 도와달라는 혈맹 미국의 요구에 적극 호응함으로써 국가 안보를 튼튼히 한다.'는 명분 아래 아비규환 생지옥에 내던져진 민초들은 한 몫 잡기 위해, 더 나은 꿈을 이루기 위해, 아니면 이도 저도 다 보기 싫어서 등의 다양한 사연들을 가슴에 품고 정글을 헤맸고 그 젊은 희생의 총합인 외화 획득과 원조가 종자가 되어 고도 경제성장의 밑바탕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미 제국주의 용병으로 아시아 민중의 독립 열망을  잔인하게 짓밟았다'는 단순한 규정만으로는 다 설명해내기 어려운 민초들의 수많은 사연들이 있다는 점도 보여주며 시대 상황에 입체성을 부여합니다.

 미군을 대상으로 한 첫 공연에서 긴장을 털어버리지 못해 무대를 망쳐버렸던 순이가 한국 장병들 앞에서 벌이는 첫 공연, 수줍음에 망설이던 순이가 자그만 목소리로 '안녕하세요~'하자 장병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안녕하세요!!'라고 함성 지르는 장면에서 왠지 모르게 왈칵 눈물이 나더군요. [황산벌]로 시작해 [왕의 남자], [라디오 스타], [즐거운 인생]을 거치며 '광대와 놀이', '한과 흥'이라는 감독이 관객에게 던지는 화두가 점점 또렷하게 다가와서 그런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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