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마지막 날 국보1호 숭례문이 불타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남대문이라는 이름이 더 친숙한, 600년 동안 서울의 상징으로 자리 잡아 온 유적이 단 몇 시간 만에 잿더미로 변하다니 너무 어이없고 허무합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수십 년 동안 숱하게 많이 지나쳤지만 그 모습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찬찬히 훑어본 기억이 전혀 없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저 역시 그렇습니다.
문화재청도 담당 분야인지라 저도 새벽2시쯤 회사로부터 전화를 받고 불려나갔습니다. 전날인 일요일 밤 9시쯤 차 안에서 라디오 뉴스로 짤막하게 남대문에서 화재로 보이는 연기가 나고 있어 진화에 나섰다는 소식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누가 불장난했구먼. 저러고 말겠지 하고 가볍게 흘려들었습니다. 다급한 야근 데스크의 전화목소리에 깨어나 졸린 눈을 비비며 나온 회사에서 화면으로 접한 숭례문의 모습은 처참하더군요.
누각이 타면서 내뿜는 불길과 연기는 땅과 물 같은 자연 환경과 마찬가지로 문화유산도 현재 살고 있는 우리가 누리고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후손들에게서 잠시 빌려온 것이라고 외치는 울부짖음으로 들렸습니다. 문화재청장은 사표를 던졌고 여러 관계기관장들도 잇따라 사과문을 발표했습니다. 대통령 당선인 측은 생뚱맞게 국민 성금으로 복구하는 게 어떠냐는 경솔한 계획을 밝혔다가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습니다. 서울시와 중구청이 화재 현장에 신속하게 설치하고 있는 가림막과 더불어 이 사회를 이끌어간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불길한 징조같디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영화 소개 글을 쓴다는 게 넓은 초원에서 풀 뜯어먹고 있는 소처럼 한가로운 팔자처럼 비치는 것 같네요. 이번 주에는 설 연휴 성수기를 살짝 피해있던 영화들 10편이 대거 개봉됩니다. 재미있을 것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점퍼]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추천해드리고 싶은 영화는 [추격자]입니다.
추격자(감독: 나홍진, 주연:김윤석, 하정우, 청소년 관람불가)
오랜만에 시종일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을 느끼며 영화를 봤습니다. 지난 주 기자시사를 놓쳤는데 ‘신인감독답지 않은 수작이다.’, ‘[살인의 추억]을 능가하는 것 같다. ‘는 등 들리는 소문이 심상치 않더니 소문답게 만만치 않은 에너지가 넘치는 영화더군요.
출장안마소를 운영하는 중호(김윤석)는 전직 형사입니다. 비리에 연루되어 불명예스럽게 옷을 벗은 뒤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서 호구지책으로 하는 일이죠. 상당한 돈을 들여 땡겨온 아가씨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는데 처음에는 빚 떼어먹고 도망갔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휴대폰 번호로 호출된 아가씨들이 사라졌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곤 그 놈이 다른 곳에 팔아넘겼을 것이라 짐작하고 형사시절 몸에 체득했던 동물적인 감각으로 놈을 잡으러 나갑니다. 운 좋게 놈을 잡아 경찰에 넘기지만 경찰 사칭에 폭행 혐의까지 뒤집어쓰려는 찰나 잡힌 놈인 영민(하정우)은 자신이 연쇄살인범이라고 자백합니다.
경호 경비를 맡았던 서울시장이 웬 미치광이에게 똥물 테러를 당해 곤경에 빠진 경찰집단은 연쇄살인범 검거라는 뉴스로 곤경에서 벗어나고자 총력 수사를 펼치는데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면 12시간 안에 풀어줘야 합니다.
영화는 용의자인 영민이 중호에게 잡혔다가 풀려나는 비가 오락가락하는 여름밤부터 다음날 낮까지 12시간 남짓한 시간을 담습니다. 마치 미국 TV 시리즈 [24]를 연상시키는 구조인데 다른 점이 있다면 [24]처럼 화면분할이나 화면 흔들어대기 같은 기교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해보려는 별다른 기교를 구사하지 않고 철저하게 이야기와 캐릭터의 힘만으로 이런 정도의 서스펜스를 연출해낸 감독의 능력이 범상치 않습니다. [양들의 침묵]이나 [세븐] 같은 영화가 떠오르고 [폭력써클]에서 느꼈던 몸서리 쳐지도록 서늘한 충격을 오랜만에 느꼈습니다. 막판 두 인물이 아무런 대사 없이 격투를 벌이는 장면은 짐승의 그것처럼 야생적이고 최후의 싸움 뒤 바닥에 옆으로 누운 중호의 얼굴은 인간의 것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영화사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기자시사가 끝난 뒤 여기저기 제작사에서 감독 연락처를 따려는 시도가 줄을 이었다더군요.)
[타짜]에서 몇 장면 등장하지 않았지만 다른 주연배우들을 제치고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바 있던 김윤석은 이 영화를 보고나면 [천하장사 마돈나]나 [타짜]에서 보여준 모습은 전체의 3-40%에 지나지 않고 이 영화에서는 120%를 쏟아낸 것 같습니다. 타고난 능력과 본능적인 감각에 정교하고 예리한 연구와 노력이 합쳐져 괴력을 발휘하는 몇 안 되는 배우 같습니다. 연쇄살인범을 정신없이 밤을 새워가며 뒤쫓지만 남을 돕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착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냥 자신이 소유한 생산수단인 마사지 아가씨들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시작하지만 아가씨의 어린 딸이 불쌍해서 점점 일말의 양심이 되살아나는 과정이어서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옵니다.
매력적이지만 웬만해선 엄두내기 어려운 연쇄살인범을 연기한 하정우도 경력 상으로나 나이 상으로나 대선배인 김윤석과 대적할 만한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어냈습니다. 심리분석가와 대면하며 본성을 설핏 드러내는 장면에서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분노와 잔인성이 설핏 비치는 표정과 말투를 보여주는 그의 연기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네요. 가능성 있는 신인으로 주목받은 뒤 예술영화 전용배우로 흐르지 않는가 했더니 대중과 함께하는 긴 호흡을 만들어갈 터전을 마련했다고나 할까요.
서울시장 똥물 테러나 냉철한 판단과 신속한 대응과는 거리가 먼 무능한 경찰 조직의 묘사가 얼핏 보면 치기어린 비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공동체 구성원 하나하나의 안위를 지켜주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한국 사회의 시스템 부재를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실질적인 문제해결 보다는 조직의 논리가 앞설 수밖에 없고 아무리 시급하고 중요해도 드러나지 않는 일이라면 제쳐두고 때깔 좋고 광나는 일은 전광석화로 해치우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는 우리 사회 말입니다. 절대적인 선과 악은 없고 다만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인마나 그를 추격하는 사람이나 다 같은 인간이라는 나른한 허무감을 안겨주며 극장 문을 나서는데 웬만하면 살려둘 수도 있었을 법한 마지막 희생자를 그렇게 처리하는 것을 보니 참 독한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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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 [대한이, 민국씨]는 발달장애를 앓는 두 애어른이 순진한 고집으로 세상과 부닥쳐 나가는데 다행이 착하고 따듯한 주변 사람들 덕분에 그럭저럭 살아나간다는 착하고 따뜻한 영화로 억지로 웃기지 않으려는 코믹 에피소드의 수위 조절이 맘에 드는 영화입니다.
[화성아이, 지구 아빠]는 잘 나가는 공상소설 작가가 자신이 화성에서 왔다고 믿는 엉뚱한 아이를 입양한 뒤 서로를 이해하고 교감한다는 내용의 따뜻한 영화로 대사의 풍부한 표현과 재치가 인상적입니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비틀즈의 명곡들을 배경으로 깔며 6,70년대를 살아나가는 젊은이들의 초상을 그린 청춘물 뮤지컬입니다.
[스파이더 위크가의 비밀]은 어른 아이 함께 보기에 적합한 비교적 예쁜 판타지물이라는 설명이구요.
[점퍼]는 순간이동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그 능력을 이용해 호화롭게 살고 있는데 별안간 알 수 없는 세력의 공격을 받는다는 액션 어드벤처 물입니다. 좋은 영화와 함께 주말 잘 보내시고 숭례문 소실의 상실감을 치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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