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한승수 유엔 기후변화특사를 사실상 새 정부의 초대 총리로 내정하기까지는 한 달여의 '숙성기간'이 필요됐다.
그간 총리 인선을 둘러싸고 각종 추측 보도가 난무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인사들의 이름이 리스트에 오르내리기를 반복했다.
특히 한 특사는 말 그대로 '다크 호스'로 막판 스퍼트를 내면서 내각 수장으로서 총리실 입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인선 과정 = 이 당선인은 당선 직후부터 총리 인선 구상에 착수했다.
10여 명의 비정치인과 정치인 후보군을 놓고 '투 트랙' 검토에 들어간 것.
초기 검토단계에서는 비정치인보다는 정치인에 무게 중심이 실려 있었다는 게 측근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1순위는 당연 경선 라이벌이었던 박근혜 전 대표였고,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자유신당(가칭)에 몸담고 있는 심대평 국민중심당 대표를 차순위로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4월 총선에서 과반의석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카드였다.
특히 '박근혜 총리' 카드는 대선 직전부터 끊임없이 제기됐고, 박 전 대표가 당선인의 중국특사를 수용한 사실이 지난 4일 전해지면서 가장 유력한 카드로 떠올랐다.
그러나 수차례의 비공식 의사타진에도 불구, 박 전 대표가 공개적으로 총리직 거부의사를 거듭 밝히자 이 당선인도 이달 중순께 '박근혜 카드'를 최종 접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시중 전 갤럽회장을 비롯한 원로그룹과 일부 소장파 의원들이 삼고초려를 거듭 건의했지만 '이제 그만하자'며 역설득을 했다는 후문이다.
심대평 대표가 10일 자유신당 발기인 대회, 14일 현판식에 잇따라 참석하면서 심대평 카드도 소멸됐다.
비슷한 시기에 정치인 카드가 모두 날아간 셈이다.
이 당선인은 이때부터 비정치인 카드를 본격 검토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졌다.
14일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정치적 고려를 배제하고 일 중심 총리, 자원외교형 총리를 뽑겠다며 아예 새 인선기준을 제시했다.
그 기준에 따라 손병두 서강대 총장과 한승주 전 외무장관, 안병만 전 한국외대 총장, 이경숙 대통령직인수위원장, 이원종 전 충북지사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렸다.
인사팀에서도 비슷한 명단을 올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승수 특사의 이름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인사팀 관계자들도 "한승수 이름은 없다"고 확인했다.
하지만 우선 순위로 검토했던 손병두 총장이 개인적 사유를 이유로 총리직을 고사하고 이경숙 위원장에게는 다른 중책을 맡기기로 결심한 상황에서 마땅한 적임자가 없자 원로그룹들이 한 특사를 '와일드 카드'로 뽑아든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9일께 한 측근이 한 특사를 처음 거론했을 때만 해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이 당선인도 대안이 없자 18, 19일께부터 '한승수 카드'를 들여다 보기 시작했고, 의외로 여러 장점들을 발견하면서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관측이다.
정치와 경제, 외교실력을 두루 갖춘 그의 화려한 경력에다 강원도에 연세대 출신이라는 점이 이 당선인의 마음을 사로 잡은 것.
물론 박 전 대표의 인척이라는 점도 플러스로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한승수 카드에 무게를 두지 않았던 측근들도 최종인선이 임박해 오면서 "당선인이 한승수 특사를 꽤 좋아하는 것 같다"며 내부 기류를 전했다.
그러다 지난 20일 이 당선인측이 한 특사의 연락처를 수배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한승수 카드가 본격 부상했고, 21일부터는 한승수 총리 내정이 기정사실화되기 시작했다. 24일에는 이 당선인이 시내 모처에서 한 특사를 직접 만나 총리직에 대한 의사를 타진했다는 얘기가 포착됐다.
같은 날 오후 한 특사는 기후포럼 특강차 국회를 방문한 자리에서 방명록에 '위민진정'(국민을 위하는 정치에 진력하라는 뜻)'이라고 적어 사실상 총리직에 대한 교감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직접면접과 1~2시간 '프리토킹' = 이 당선인은 이번 총리 인선을 통해서도 자신의 '거북이' 인사 스타일을 그대로 보여줬다는 평가다.
강한 업무추진력으로 '불도저'라는 별칭을 갖고 있지만 인사 만큼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신중함을 유지하는 이 당선인의 특징이 그대로 묻어난 것.
이 당선인측은 애초 지난 20, 21일께 총리 지명자를 발표한다는 방침이었으나 중간에 인선논의가 급물살을 타면서 15일을 전후로 발표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돌았다.
하지만 총리 인선은 무기한 늦춰졌고 25일 현재까지도 공식 발표되지 않고 있다.
총리 지명자는 내주 초에나 발표될 것으로 예정이다.
실용주의에 기반한 용인술도 그대로 묻어났다.
측근들이 1936년생인 한 특사에 대해 '올드보이'로 새 정부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하자 이 당선인이 '일이 중요하지 나이가 크게 문제가 되느냐'고 일축했다는 얘기가 있다.
이 당선인은 그러나 이번에 여러 측면에서 새로운 인사 스타일도 선보였다는 평가다.
이경숙 인수위원장 인선 사례에서 보듯 누가 뭐래도 처음 마음에 둔 사람을 발탁하는 기존 스타일과 달리 1차 후보군에조차 없던 인사를 과감히 낙점한 것.
우연의 일치일 수는 있으나 유력 후보군을 대상으로 언론의 간접 검증을 거치며 솎아내기를 한 것도 한 특징이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이 당선인이 유력 후보군들을 직접 면접했다는 것이다.
정부의 인사자료나 정보기관의 존안자료를 토대로 총리나 각료를 확정한 뒤 추후 통지하는 방식과는 달리 본인이 직접 심층면접을 통해 인물의 됨됨이와 '그릇'의 크기를 판단하는 것.
물론 여기에는 막판까지 보고 또 보면서 최상의 선택을 하려는 계산도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이 당선인은 지금까지 총리와 각료 후보군 20여 명을 면접한 것으로 전해졌다.
주호영 대변인은 "특정인 면담 여부에 대해서는 확인해 줄 수 없지만 필요시 당선인이 후보들을 직접 면담한다"면서 "당선인이 후보군에 오른 인사들과 적어도 국정방향에 대해 이야기 해 보고, 과연 맞는지 등을 판단해 보고 싶어하는 것 같다. 중요한 정책에 관해서는 뜻이 맞아야 하는 만큼 철저히 알고 나서 일할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핵심 측근도 "이 당선인은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을 직접 만나 1~2시간 동안 프리토킹을 하며 국정에 관한 아이디어를 얻기고 하고 의견을 나누기도 한다"면서 "정말 독특한 인사스타일"이라고 평가했다.
철저한 보안과 교차검증도 한 특징이다. 여러 팀에 인사 안을 맡기되 서로 비밀을 철저히 유지케 해 A팀에서 하는 일을 B팀과 C팀이 알지 못한다.
이 당선인은 원로그룹과 소장파그룹 등 여러 통로를 통해 인사의견을 수렴한 뒤 정두언 의원 등 실무팀을 통해 1차 후보군을 압축하고 그 뒤로는 핵심 정책참모인 유우익 교수 등과 최종 압축작업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 의원 본인도 지난 주말 "나도 1주일 전 명단을 건네 주고 나서는 인사에서 아예 손을 뗐다"고 말한 바 있다.
인사검증 등 실무는 이 당선인의 복심인 박영준 전 서울시 정무국장이 도맡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이 당선인은 주요 인사 접견 때 주로 애용하는 롯데호텔을 이번에도 적극 활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