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건우·윤정희 선생 부부를 다른 언론과 섞이지 않고 따로 만나 인터뷰하는 것도 수월한 일은 아닐텐데, 운좋게도 어제 두 분과 저녁 식사을 함께 했습니다.
저 혼자는 아니었고, 클래식을 담당하고 있는 후배와 보도국 선후배 몇 명과 함께였습니다.
연주장처럼 막힌 공간, 8석 식탁의 상당히 집중된 분위기에서 두 사람의 인생과 생각의 편린들을 말투, 목소리의 고저, 몸짓, 표정, 식사습관 등을 통해 미세하게 전달 받았습니다.
두 분이 육성으로 전달한 의미있는 말은 물론이구요.
백건우 선생은 지난해 12월 한 유력 일간지와 꽤 긴 인터뷰를 했습니다.
주말판 첫 면부터 다음 장까지 넘어가는 인터뷰였는데, 한 줄을 인용하겠습니다.
(...) '인터뷰에 응하는 그의 말도 서툴고, 잘 들리지 않았다. "피아노를 치면 말이 필요 없어 좋겠군요"라고 농을 하니, 그는 “정말 그렇다”고 동의했다.' (...)
어제 이 기사의 진위를 나름대로 판단해보니, 백 선생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 건 맞지만 '서투르다'란 표현은 좀 서투르고 서두른 표현이 아닌가 싶습니다.
백건우 선생의 말이 좀 어눌한 느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찬찬히 들어보면 곧 글로 옮겨도 될 만한 아주 근사한 표현을 구사한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몇 몇 대목은 말이죠. 신문 기사로, 즉 활자로 옮겨놓으면 그저 그럴 지 모르지만 영상과 말이 함께 나가는 인터뷰라면 꽤 그윽한 분위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은.
저는 평소 '클래식 연주자는 테크니션인가 크리에이터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연주자가 나름대로 곡을 해석한다고는 하지만 그건 '창조된' 악보를 그야말로 '해석'하는 것이지 창조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거죠. 논의를 조금 확대하자면 도대체 클래식과 클래식 연주자에 부여되는 품격과 존경의 정도는 정당한 것일까.라는 의문입니다. (하긴 플라톤 이래의 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에 불과하다는 얘기도 있는데 하늘 아래 뭐 새로운 창조가 있으랴마는)
마침 동석했던 한 선배가 연주자는 창조하는 사람이 아니지않냐는 질문을 던졌고 백건우 선생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악보의 음표는 심볼에 불과한 겁니다. 악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어요. 연주라는 것은 음표의 까만 점에 생명을 집어넣는 (창조적인) 작업입니다. 연주자는 작곡자가 생각못한 것도 끄집어 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 연주회의 프로그램을 짜는 것도 창조적인 일인거죠."
자, 백 선생의 말이 서투르게 느껴지시나요?
제 의문은 100% 해소되진 않았지만, 적어도 저 얘길 듣는 순간만큼은 머릿 속으로는 카메라를 돌리고 있었습니다. (카메라도 없는데, 싱크 날아가는구나~~아쉬워하며^^)
P.S ________
백 선생이 저 얘길 하는동안 기자수첩도 펜도 없고 (또 이런 캐주얼하고 비공식적인 , 그것도 식사시간에 그런 걸 꺼내놓고 적는다는게 실례이기도 해서) 제 기억력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지는 꽤 되고 해서 할 수 없이 핸드폰을 슬쩍 꺼내 엄지질을 했습니다.
저는 평소에는 글귀나 생각이 떠오르면 핸드폰에 대고 녹음도 합니다만 초면에 미친 사람 취급받을 수도 있는 걸 시도하긴 어렵더군요.^^
저는 다른 약속이 있어 조금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나중에 들으니 고 윤이상 선생에 대한 질문을 받은 백건우 선생이 윤 선생에 대한 음악적 평가와 그의 사람됨과 인생에 대한 평가는 구분되야 한다면서 다소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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