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남짓 남겨둔 대선. 이번 대선의 거의 유일한 쟁점이 ‘BBK’ 입니다. 길게 말하면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BBK 주가조작과 횡령 연루 의혹’. 이 의혹에 대해 검찰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명쾌하게, “이 후보는 무혐의”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BBK는 여전히 살아 있는 쟁점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BBK는 법적으로는 죽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죽을 수가 없는 쟁점이 된 것입니다. 그 배경에는 BBK에만 매달린 언론의 역할이 있습니다.
검찰이 BBK 의혹 수사결과를 발표한 지난 5일 SBS 8시뉴스는 대통합민주신당이 검찰을 격렬하게 비난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명박 후보가 BBK 등에 돈을 댄 주인이라는 것이 국민의 상식인데, 검찰은 법보다 무서운 이런 상식을 깨고 이 후보에게 면죄부를 줬다는 것이었습니다. 뉴스는 이날 대통합신당 정동영 후보가 유세를 중단하고 검찰 규탄 집회를 주도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는 “상식을 탄핵한 검찰의 결정을 국민이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다음 날 그는 “검찰은 수사를 한 것이 아니라 거대한 수구부패동맹의 편짜기에 가담했다”는 표현까지 쓰면서 검찰을 비난했습니다. 규탄집회 연설이 그에게는 바로 유세였습니다. 그는 투표일을 이주일도 채 남겨두지 않은 천금 같은 시간을 바쳐 BBK에 ‘올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 후보가 이명박 후보를 이길 수 있는 카드는 BBK 밖에 없다는 현실을 말해줍니다. 자신이 대통령으로서 어떤 장점을 갖추고 있는지를 국민에게 부각시키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 낸 것은 모든 쟁점을 BBK로 수렴시킨 언론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뉴스는 정책과 비전, 인격과 삶의 태도에서 누가 적임자인가를 집중적으로 따지기 보다는 ‘BBK 한방’이 핵폭탄이 될 것인가, 아니면 불발탄이 될 것인가에만 온 국민의 시선을 집중시켰습니다. 뉴스가 BBK에 쏟았던 것과 같은 집중력으로 후보들의 노선과 인간에 대해 집중한다면, 국민들은 후보 선택에 필요한 정보를 더 많이 가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뉴스는 유권자들의 입장에서 BBK가 정말 중요한 쟁점인가를 냉정히 따져보았어야 합니다. 뉴스는 한 번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이번 대선의 진짜 쟁점은 기업에 대한 규제를 비롯한 각종 경제 사회적 규제를 과감히 풀어 국민생활을 향상시키느냐, 아니면 지금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경제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현 수준에서 유지하면서 사회보장제도를 더욱 강화함으로써 국민생활을 향상시키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뉴스는 이것을 쟁점으로 부각시키지 않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거부감을 이명박 후보가 고스란히 자신의 자산으로 독점한 것은 언론이 쟁점을 올바로 부각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뉴스는 네거티브 폭로, 그 중에서도 유독 BBK에 집중함으로써 이명박 후보의 다른 결점들은 모두 BBK에 가려졌습니다. 이제 그 BBK 폭탄마저 해체됨으로써 대선의 쟁점이 소멸되는 상황에 빠진 것입니다. 뉴스가 정치인들의 주장에 대해 일체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보도하고, 물리적인 균형을 맞춰 나열하는 관행도 과감히 고쳐야 합니다. 검찰이 상식을 탄핵했다는 정동영 후보의 주장을 그냥 넘긴 것도 고쳐야 할 사례의 하나입니다.
‘법보다 무서운 국민 상식’이라는 정 후보의 표현 자체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의혹이 사실일 것’이라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법도 존중해야 하는 ‘국민 상식’이라고 규정한 것은 지나쳤습니다. 그의 말을 곱씹어 보면 검찰 수사도 “혐의가 사실일 것”이라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에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편 BBK 사건에 대한 검찰 발표는 군데군데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구절을 집어넣으며, 조심스러운 표현을 쓰고 있었습니다. 검찰의 발표를 보도한 지난 5일 SBS 뉴스에 따르면 김홍일 서울중앙지검 3차장은 “다스가 이 후보의 소유라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으며, 이 후보가 김경준과 주가 조작을 공모했다고 인정할만한 증거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뉴스는 “검찰은 이 후보가 김경준 씨의 범죄 혐의에 개입되었다는 모든 의혹이 사실무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보도했습니다. “개입되지 않았다”는 것과 “개입되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는 표현입니다.
지난 6일 SBS 뉴스는 여론조사를 해 보니 이명박 후보가 무혐의라는 수사 결과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49.7%로 나왔다고 보도했습니다. 정치공세가 아니더라도 수사결과에 대한 불신이 크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사건을 97% 복원했다”는 검찰 발표를 들어 여전히 남는 의문을 “부족한 3%”라고 표현한 것은 수사결과에 대한 불신을 과소평가한 대목입니다. 뉴스가 BBK를 유일한 대선 쟁점으로 부각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BBK에 대한 검찰 발표가 실체적 진실에서 3%만 부족하다고 단정한 것도 지나친 보도였습니다. 반면에 대선 후보 6명의 하루 일정을 추적한 SBS 뉴스의 보도는 BBK 소식에 식상했던 시청자들의 마음을 모처럼 편안하게 해주었습니다.
이런 뉴스는 방영시간 등 물리적인 균형 못지않게 내용의 균형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정동영 후보와 이명박 후보의 일정은 매우 대조적이었습니다. 정 후보의 경우 당사에서 보고받고, 회의참석, 케이블 방송 녹화, 포스터용 사진촬영 등 그저 바쁜 일정만 부각되었지만, 이 후보의 경우 한옥에서의 건강한 생활, 인간적인 면모, 시민들의 기대어린 목소리 등 전혀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형식적인 균형은 맞췄지만, 내용의 균형은 맞추지 못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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