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무르익기도 전에 겨울이 먼저 찾아와 첫 눈까지 뿌렸네요. 기온이 뚝 떨어진 지난 주말에는 부랴부랴 겨울 옷과 외투를 옷장에서 꺼내고 여름 옷 한 무더기를 세탁소에 맡겼습니다. 지난 주말에는 [식객]이 [베오울프]를 간발의 차로 따돌리고 3주차 1위를 차지하며 2백만 명 관객을 돌파했습니다. 김윤진 주연의 [세븐 데이즈]가 그 뒤를 이었고 [색, 계]도 극장에 좀처럼 나오지 않는 중년층의 호응에 힘입어 선전하고 있네요. 이번 주에도 많은 영화가 개봉됩니다. 비수기에는 쎈 영화가 없는 대신 다양한 영화들이 선보여 푸짐한 식탁이 차려져 골라보는 재미가 더할 것 같습니다.
라비앙 로즈(12세 관람가)
프랑스의 국민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일생을 그린 전기 영화입니다. 전기 영화가 많이 택하는 시간 순서의 배열을 탈피해서 전성기, 어린 시절, 최후 등을 뒤섞어 보여주기 때문에 다소 어리둥절하고 혼란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런 편집이 오히려 그녀의 비극적인 삶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데 효율적인 것 같습니다. 또 화려한 명성이나 아름다운 노래에만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그녀의 삶에 펼쳐진 비극과 마약과 술에 쩔어사는 모습, 투병 생활 등도 동등한 비중으로 다뤄 맘 편하게 볼 수만은 없습니다.
거리의 가수였던 어머니와 곡예단 단원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에디트는 매춘굴을 운영하는 할머니 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파리로 올라와 어머니처럼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연명하다가 클럽 사장에게 발탁되어 실력에 걸맞은 명성을 얻게 됩니다.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던 시절 만난 유부남 권투선수인 막셀과의 만남과 사랑, 뜻하지 않은 이별이 그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해석입니다. 여러 번 나오는 롱 테이크 가운데 막셀이 침대에서 자는 그녀를 깨우는 환상에서 측근들이 전해주는 사고 소식에 충격 받은 그녀가 절망의 절규를 내뱉으며 비틀거리다가 문을 열고 무대로 나가 ‘사랑의 찬가’를 부르는 장면은 영화라는 매체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큰 울림을 전해줍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그녀의 노래들이 그저 아름답고 듣기 좋은 음악이 아니라 그녀의 굴곡 많은 삶과 함께하며 그 고통과 통찰, 위로를 담고 있기 때문에 보다 강렬하고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이유가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아름답고 깔끔한 눈물이 아니라 그녀의 고통이 같은 주파수로 가슴에 공명하며 아프고 쓴 눈물이 흘러 나왔습니다.
마리온 코티아르는 에디트 피아프의 소녀 시절부터 말년까지를 연기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작은 키에 구부정한 자세는 물론 노래할 때 미묘한 표정까지 완벽에 가깝게 재현합니다. 노래 부르는 장면은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를 틀어놓고 하는 립싱크인데 이 배우는 그것을 립싱크인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연기합니다. (당연히 이브 몽땅과의 이야기도 나올 줄 알았는데 등장하지 않더군요. 영화 홍보사측 설명으로는 신인이었던 이브 몽땅을 키워주며 사랑했는데 결국 차버리고 마릴린 몬로한테 가버린 역사적 사실 자체를 껄끄러워하는 이브 몽땅이 자신을 등장시키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어린 시절 영양부족으로 각막염에 걸려 안대를 쓰고 자신을 엄마처럼 보살펴주는 매춘부 손을 잡고 길을 걷다가 전봇대에 얼굴을 부딪쳐 깜짝 놀라는 어린 에디트의 놀라는 장면이 너무 귀엽고 깜찍해 가슴에 오래도록 남아있네요.
이브닝(15세 관람가)
암에 걸려 죽음을 기다리는 앤은 두 딸 앞에서 그들이 모르는 해리스와 버디 이야기를 꺼내며 횡설수설합니다. 병석에 누워있는 앤은 꿈속에서 과거와 환상을 오가며 젊은 날 친구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 겪은 설레는 사랑과 비극적 사건을 떠올리며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이브닝]은 수잔 미뇽의 소설을 [디 아워스]의 마이클 커닝햄이 각색한 영화인데 캐스팅이 화려합니다. 젊은 앤은 클레어 데인즈, 노년의 앤은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맡았고 글렌 클로즈, 토니 콜레트 뿐 아니라 요즘 스크린에서 보기 어려운 메릴 스트립까지 얼굴을 비춥니다.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여인의 일생에 대한 통찰을 전해준다는 내용이지만 구성이나 극적 긴장 등 영화적 완성도는 배우들의 명성에 비해 다소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에서도 앤의 직업이 가수로 몇 곡의 노래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특히 가사와 육아에 허덕이다가 주방에서 딸을 앉혀놓고 노래 부르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클레어 데인즈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는 예쁘고 멋있었는데 성장한 뒤 요즘 촬영한 [스타더스트]와 이 영화를 보니 그때 매력은 다 어디 갔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너무 기골이 장대해진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애플시드(12세 관람가)
"[애플시드]는 [공각기동대]로 유명한 시로 마사무네의 원작만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3D에 2D를 입히는 툰 셰이딩 기술로 만들어진 화면은 전통적인 셀 애니메이션에서 보기 힘든 역동적인 쾌감을 안겨준다."
보도 자료에 나온 설명인데, 미래 사회 인간과 복제인간 사이의 갈등을 그리고 전투장면이 나온다는 점에서 [공각기동대]와 흡사하지만 그 주제의 심오함이나 무게감은 떨어집니다. 새로운 제작 기법은 전투 장면과 비행 장면 등에서 새로운 역동감을 느끼게 해주는데 결말부로 갈수록 좀 황당하다 싶은 이야기 전개가 불만스럽습니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시각적 쾌감만으로도 만족할 만하겠지만 그 이상을 기대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따를 것 같네요. 좋게 말하면 [공각기동대]에 비해서 눈높이를 확 낮춘 버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통 애니메이션 [마녀 배달부 키키]와 [귀를 기울이면]도 개봉됩니다. 이밖에 엘리자베스 1세의 일대기를 그린 영국 워킹 타이틀 제작의 [골든 에이지], 구스 반 산트 감독의 [파라노이드 파크], 3편에서 끝난 줄 알았는데 4편이 또 나온 [쏘우4],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배우들이 총 출동해 뉴욕 한인사회를 그린 [웨스트 32번가] 등이 개봉됩니다. 좋은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