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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서 만난 피아니스트 김선욱

안녕하세요? 한국에서는 곧 추석이더군요. 영국 온 지 한 달 조금 지났는데, 추석이 언제인지도 잊고 있다가 오늘 이웃집에 걸려있는 한국 달력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송편 생각이 간절하네요. 기쁘고 풍요로운 추석 연휴 보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영국 공연장에서 만난 한국 음악가, 피아니스트 김선욱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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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의 중심지인 런던에 사는 건 아니지만, 내가 사는 곳 근처에도 공연장은 꽤 많다. 가장 가까운 공연장이 워릭 대학교 안에 있는 워릭 아트센터. 도보로 10분 거리다. 오페라, 콘서트, 뮤지컬, 연극 등등 다양한 공연이 열린다. 영화관도 있다. 런던 외의 아트센터로는 거의 제일 큰 규모라고 한다.

30분 거리의 버밍엄은 영국에서 손꼽히는 대도시로 시티 오브 버밍엄 심포니 오케스트라(CBSO. City of Birmingham Symphony Orchestra)가 유명하다. 사이먼 래틀이 베를린 필로 자리를 옮기기 전 이끌었던 오케스트라다. 현재 음악감독은 핀란드 출신의 지휘자 사카리 오라모다. 버밍엄 심포니 홀에서는 CBSO 공연 외에도 세계적인 연주자들의 리사이틀이 자주 열린다.

내가 지난해 '미스 사이공' 취재차 영국 출장 왔을 때 공연을 봤던 극장도 버밍엄에 있었다. 버밍엄 히포드롬 시어터. 뮤지컬도 많이 공연되지만, 버밍엄 로열 발레단의 상주 공연장이기도 해서 발레 공연도 자주 열린다. 이밖에도 버밍엄에는 공연장이 꽤 많다.

역시 30분 거리의 스트랏포드 어폰 에이븐은 셰익스피어의 고향마을답게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 RSC가 공연하는 극장들이 있다. 거의 1년 내내 셰익스피어 원작의 연극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내가 영국에 도착하고 가장 처음 본 공연은 워릭 아트센터에서 본 것도, 버밍엄의 공연장에서 본 것도 아니었다. 1시간 이상 고속도로를 타고 가야 하는, 첼트넘(Cheltenham)이라는 마을에서 본 것이었다. 생소한 이 도시에 가게 된 것은, 코츠월드에 놀러갔다가 들어간 찻집에서 우연히 집어든 안내책자 때문이었다.

'Cheltenham Concert Series'라는 제목의 안내책자를 무심히 펼쳐들었는데, 표지를 넘기자마자 친숙한 얼굴이 웃고 있었다. 바로 피아니스트 김선욱이었다. BBC 내셔널 오케스트라 오브 웨일즈의 공연에 '2006 리즈 콩쿠르 위너'인 Sunwook Kim이 협연자로 나온다고 돼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 있을 때 들었던 김선욱의 영국 공연 일정 중에 BBC 내셔널 오케스트라 오브 웨일즈와 협연하는 것도 포함돼 있었던 것 같다.

9월 13일 저녁 7시 30분. 첼트넘 타운홀. 지휘자는 오타카 타다아키. 협연 곡은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영국에서 김선욱을 만날 수 있구나! 그런데, 첼트넘이 도대체 어디지? 제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지난번 글을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인'은 내비게이션 시스템에서 길을 안내해 주는 여자 목소리를 일컫는 말이다.^^) 예상 주행시간 1시간 10분. 아주 먼 곳은 아니구나. 이 정도면 갈 수 있겠다.

그러나, 먼저 남편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한국에서도 가끔 그랬지만, 나와 큰 딸 은우는 음악회를 보러 들어가고, 남편은 세 살배기 둘째 은형이를 데리고 밖에서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다행히 남편은 '김선욱이 여기까지 온대?' 하면서 선선히 보러 가라고 했다. SBS 후배로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김경희 기자도 같이 가기로 했다.

공연 날. 학교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5시쯤 첼트넘을 향해 출발했다. 첼트넘은 생각보다 멀었다. 고속도로에서 상당히 달렸는데도, 1시간 반 가까이 걸렸다. 공연장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저녁 먹을 식당을 찾으니, 공연 시간 30분 전이었다. 결국 급하게 저녁을 먹고 공연장까지 뛰어야 했다. 김경희 기자도 남편에게 어린 딸을 맡겼다. 남자 둘이 아이 둘을 데리고 기다리게 된 셈이다.

 

첼트넘 타운홀은 아담하고 예쁜 건물이었다. 음악 전문 공연장은 아니고, '다목적'으로 사용되는 곳이다. 때로는 결혼식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공연도 열리는. 하지만 1년 공연 프로그램을 보니 꽤 알차 보였다. 객석은 거의 꽉 차 있었다. 서양의 음악회장이 으레 그렇듯이, 많은 관객이 은발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다. 은우는 최연소 관객이었다. 또 우리가 유일한 동양인 관객이었다.

첫 곡은 브람스의 대학축전서곡이다. 오케스트라가 친숙한 선율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지휘자 오타카 타다아키는 키가 자그마하고, 딱 일본인처럼 생겼다. 현재 삿포로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이며, 내한공연을 한 적도 있다. 1987년부터 1995년까지 BBC 내셔널 오케스트라 오브 웨일즈의 수석 지휘자로 있었고, 계관 지휘자 칭호와 영국제국 훈장까지 받았다고 한다. 오타카 타다아키의 섬세하고 빈틈없는 지휘에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열과 성을 다한 연주. 김선욱 때문에 온 거지만 오케스트라도 괜찮다. 만족스럽다.

첫 곡 연주가 끝나고 드디어 협연자가 나온다. 김선욱이다.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봤지만, 여기서 이렇게 보게 되니 새삼 감개무량하다. 옆자리의 은우가 '엄마, 맞지?' 하고 다시 확인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대를 주시한다.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는 김선욱이 오는 11월 런던 필과 협연할 때 연주할 곡이기도 하다. 화려한 오케스트라 연주와 눈부신 피아노의 기교가 어울리고, 감성적인 로맨티시즘이 서린 곡. 김선욱의 연주는 훌륭했다. 오케스트라와 약간 호흡이 안 맞는 듯한 때도 있었지만 흠 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김선욱은 특유의 에너지와 파워를 실어 뜨거운 격정을 표현하고, 섬세한 터치로 짙은 서정을 드러냈다. 그 유명한 18번 변주의 멜로디는 가슴 시리게 아름다웠다.

김선욱의 연주가 끝나자 큰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기서는 공연이 좋았을 때 박수와 함께 발을 구르기도 하는 모양인지,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진동과 함께 느껴졌다. 몇몇은 기립하기도 했다. 우리도 손이 아플 정도로 박수를 보냈다. 영국서 음악회를 여러 차례 봤다는 김경희 기자는 '영국 청중들이 원래 좀 냉담한 편인데, 이 정도면?' 상기된 은우는 '엄마, 왜 이렇게 연주가 빨리 끝나는 거야? 좀 더 했으면 좋을 텐데' 했다.

여러 차례 커튼콜 후 인터미션. 우리는 김선욱을 만나러 백 스테이지로 갔다. 공연장 직원에게 '한국에서 왔는데 혹시 피아니스트를 만날 수 있겠느냐'고 물으려는 참인데,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Pianist?' 하더니 따라오라고 손짓을 한다. 말 안 해도 피부 노랗고 머리 까만 이 동양 관객들이 누굴 만나러 왔는지 척 보고 알았나 보다

한국에서 연주할 때도 항상 그랬지만, 땀에 푹 젖은 김선욱이 함께 연주한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인사를 받고 있다. 모두 '연주 좋았다', '훌륭했다'고 칭찬하고 있다. 잠깐 기다렸다 다가갔다. 김선욱다. 내가 영국 연수 가면 김선욱이 영국에서 연주할 때 보러가겠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다. 너무 반갑고 좋아서 내가 먼저 손을 덥석 잡고 흔들었다.

김선욱은 다음날인 14일에 카디프에서 똑같은 레퍼토리로 공연한다고 했다. 카디프는 웨일즈의 중심도시이니, 카디프 공연이 사실 훨씬 큰 공연이다. 첼트넘에서는 매년 BBC 내셔널 오케스트라 오브 웨일즈를 네 차례 초청해 공연을 여는데, 이번 공연도 그 중의 하나란다. 그러니까 첼트넘 공연은 카디프 공연에 앞선 연습 공연 같은 느낌이랄까. 며칠 전에 카디프에 도착한 김선욱은 이미 오케스트라와 리허설을 몇 차례 마쳤다고 했다.

한참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공연장 직원이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너희 남편들이 아이들 데리고 밖에 와 있는데, 알고 있니?' 한다. 이 아저씨, 아까 입장할 때 우리 일행을 봤나 보다. 그러니까 남편과 아이들도 같이 왔던 걸 알지. 어쨌든 오지랖도 넓다. 백 스테이지까지 찾아와서 알려주니 말이다. 남자들끼리 아까 저녁 먹던 음식점에서 맥주 한 잔 하면서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로비로 나갔다.

정말 '남편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은형이가 음식점에서 하도 시끄럽게 해서 나왔다고 한다. 공연장 안에 카페 같은 곳이라도 있으면 거기서 기다릴 텐데, 마땅히 기다릴 곳이 없어서 어딜 가야 하나 하는 참이었단다.

결국 우리는 본 윌리엄스와 엘가의 곡을 연주하는 2부를 포기하고 나왔다. 대신 공연장 근처 적당한 곳을 찾아 음료수를 마시며 이야기나 하기로 했다. 연주가 끝나 옷을 갈아입고 나온 김선욱과 함께. 김선욱은 음악회가 끝나면 오케스트라와 함께 다시 카디프로 돌아간다고 했다. 1시간 정도 시간이 있는 셈이다. 다행히 오래 헤매지 않고 펍을 한 곳 찾았다.

시끌벅적한 펍에서 아이들은 주스를, 어른들은 맥주를 한 잔씩 시켜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김선욱은 최근 유럽 연주 일정이 많아 한 달에 세 번이나 한국과 유럽을 오갔다고 한다. 혼자 연주 여행 다니는 게 힘들겠다고 했더니, 그래서 빨리 결혼하고 싶다고 농담 반 진담 반 같은 얘기를 하며 웃었다. 

"그래도 영국에서 열리는 리즈 콩쿠르에서 우승해서 그런지, 영국에 오면 마음이 편해요."

다른 연주자들도 비슷하단다. 독일 콩쿠르에서 상 타면 독일이, 프랑스 콩쿠르에서 상 타면 프랑스가 왠지 친근하고, 연주할 때 마음이 편하다고 한단다. 자기를 인정해준 곳에서 연주한다고 생각하면 그럴 것도 같다. 내년 2월 예종 졸업한 후의 계획을 물었더니, 아직 확정하진 못했지만 유럽으로 오고 싶다고 한다. '영국에 오면 좋을 텐데' 하고는, 1년 있다 갈 사람이 이런 얘기 하는 게 스스로도 우스워 풋 웃었다.

김선욱은 카디프로, 우리는 코벤트리로 길을 떠나기 위해 헤어지면서, 혹시나 버밍엄이나 워릭 아트센터에서 연주해 달라는 오퍼가 들어오면 꼭 '해 달라'고 했다. 앞으로 1년간은 '우리 동네'니까. 김선욱은 버밍엄에서는 꼭 한 번 연주해 보고 싶다고 했다. 버밍엄 심포니 홀은 DVD에서도 많이 봤다며.

오는 11월 김선욱이 런던 필과 협연할 때도 이렇게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공연은 김선욱이 세계 메이저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유럽 음악계 중심에 본격적으로 데뷔하는 무대다. 김선욱 개인 뿐 아니라 한국 음악계에도 의미 있는 공연이라고 할 만하다. 김선욱은 '런던 필 협연할 때는 제 소개에 '리즈 콩쿠르 우승' 얘기는 나오지도 않는다'고 했다. 이런저런 경력을 떠나 연주 자체로만 승부하는 무대가 될 것이라는 얘기다.

이 뜻 깊은 무대를 내 눈으로, 귀로, 직접 확인하고 싶다. 우리 집에서 런던은 첼트넘보다 좀 더 멀지만, 거리가 문젠가. 한국에서보다야 훨씬 가까운 걸. 한창 공부에 바쁜 때겠지만, 스케줄 맞춰서 할 일은 다 해치우고 가야겠다. 은우도 '김선욱 오빠 꼭 다시 보러 갈 거야!' 하고 다짐한다. 그러나저러나, 그 때는 은형이를 또 누가 보나? 또 아빠한테 맡기나? 이럴 땐 정말 은형이가 빨리 자라서 온 가족이 공연장에 입장할 수 있게 되는 게 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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