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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서커스'와 '그냥 서커스'

안녕하세요? 이제 봄 느낌 완연한 4월.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요? 오늘은 '태양의 서커스'가 한국에서 처음 선보인 '퀴담' 얘깁니다. '태양의 서커스'는, 많이들 아시겠지만,  '블루 오션(경쟁자 없는 새로운 시장을 뜻하는 말)의 대명사', 혹은 '21세기 공연예술의 혁명'이라는 다소 거창한 수사가 동원되는 캐나다의 거대 공연기업 이름입니다. '태양의 서커스'의 첫 내한공연은 올해 공연계에서 가장 기대되는 화제작으로 꼽혀왔는데요, 개막 공연을 보고 쓴 글입니다.

'태양의 서커스'가 드디어 우리나라에 상륙했다.

지난해 말 '태양의 서커스'를 취재하러 캐나다와 미국 출장을 다녀왔고,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고 있는 '태양의 서커스' 공연 다섯 편을 봤지만, 정작 이번에 한국에서 공연되는 '퀴담'은 보지 못했고, 며칠 전 잠실 종합운동장 광장에 세워진 빅탑 텐트극장에서 이 작품을 처음 만났다.

'퀴담'은 '익명의 행인'이라는 뜻이다. 아버지는 신문 읽기에, 어머니는 뜨개질에 열중하느라 전혀 대화가 없는 집. 이 집에 사는 외로운 소녀에게 어느 날 머리없는 이상한 신사 '퀴담'이 찾아온다. 홀연히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진 퀴담이 떨어뜨리고 간 모자. 소녀가 이 모자를 집어들어 쓰자마자,  거실은 '현실에서 환상의 공간으로 바뀌고, '퀴담의 세계'로 떠나는 꿈 속 같은 여정이 펼쳐진다.

태양의 서커스는 서커스 곡예에 연극과 무용, 음악 등 다양한 장르를 접목해 전통적인 서커스를 뛰어넘은 '예술적인 서커스'를 개척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내가 라스베이거스에서 봤던 'KA'나 'O' 같은 태양의 서커스 최신작들은 이미 '서커스'의 요소는 그리 두드러져 보이지 않아 더이상 '서커스'라는 말로 정의할 수 없는 아주 새로운 장르라는 느낌이 들지만, 1996년작인 '퀴담'은 이에 비하면 전통적인 서커스에 좀 더 가깝다.

'퀴담'에  등장하는 곡예들은 사실 동작 자체로는 전통적인 서커스에서 보던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공중 후프나 실크 천을 이용한 공중 곡예, '인간 퍼레이드'를 비롯한 화려한 묘기를 보여주는 이탈리아의 곡예술 '방퀸', 중국식 요요 묘기, 독일식 바퀴, 졸넘기, 손으로 균형잡기, 공중 그네, '스페인식 거미줄'로 불리는 공중 줄묘기, 조각상 묘기가 차례로 펼쳐진다.

공연을 보면서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기 직전 열렸던 평양 교예단의 첫 서울 공연을 떠올렸다. 당시 문화부에서는 '특별 취재팀'을 구성해 이 공연이 열리기도 전부터 수많은 관련 기사를 쏟아냈다. 그러던 중 나에게 '교예도 예술'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쓰라는 과제가 떨어졌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지금 솔직히 고백하자면,  당시 나는 '교예도 예술'이라는 데 별로 공감하지 못했고, 결국은 이도저도 아닌, 상당히 미적지근한 초고를 써서 넘겼다가, 이에 만족하지 못한 데스크가 거의 새로 쓰다시피 한 기사로 리포트를 만들어야 했다. 기술이 아주 뛰어난 경지에 이르면 예술이 되고,  단련된 인간의 몸이 전달하는 감정은 예술 작품에서 느끼는 감흥과 다를 바 없다는 논리였다.

사실 평양 교예단의 곡예 기술은 정말 '예술의 경지'라고 할 만했다. 기술 수준으로 따지자면 '태양의 서커스'가 '퀴담'에서 보여준 것보다 못할 바 없다. 아니, 오히려 더 아슬아슬하고 화려한 묘기를 더 많이 보여줬다.

그렇지만 평양 교예단의 공연은 '감탄'을 자아내기는 했으되, 좋은 예술 작품이 그러하듯 상상력과 감성을 자극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바로 이게 내가 당시 '교예도 예술'이라는 기사를 쓰라는 숙제를 받았을 때 고민했던 이유다. '북한에서는 교예도 예술 대접을 받고 있다'는 말은 틀리진 않는데,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교예도 예술'이라고 하기는 좀 겸연쩍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좀 거칠게 말하면, '퀴담'은 서커스를 예술적으로 '포장'하는 데 뛰어난 솜씨를 보인 작품이다. 그래서 '태양의 서커스'는 '서커스'라는 이름을 갖고는 있으되, '그냥 서커스'는 아니라는 얘기를 듣는 것일 게다.

인간의 몸이 얼마나 단련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곡예의 수준도 뛰어나지만, 여기에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를 다루는, (그리 치밀하진 않더라도) 공감 가는 '드라마'를 도입했고, 적절히 장면을 배치하고 조화시키는 연출력이 동원됐고, 세련된 무대와 조명, 그리고 의상이 이를 뒷받침했고, 무엇보다 끊임없이 감성을 자극하는, 극적인 라이브 음악이 합세해서, '예술적인 향취'를 풍기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이전에 평양 교예단의 공연을 볼 때는 곡예사의 현란한 묘기를 보면서 감탄하는 한편으로는, '얼마나 고생하며 혹독하게 연습했을까' 싶어 안쓰럽고, 때론 불쌍하게 느끼기도 했는데, '태양의 서커스'를 보면서는 그런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으니.

평양 교예단이 우리보다 못 사는 북한에서 온 데다, 전통적인 서커스는,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어렵고 못 살 때의 여흥거리, 뭔가 쇠락한 이미지로 받아들여지는 것과는 달리, '태양의 서커스'는 '블루 오션의 대명사'니, '거대 공연기업'이니, 하는 후광이 너무 압도적이라 그랬을까.

'퀴담' 한국 공연 기획사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은 기억도 난다. '퀴담'의 여러 장면 중에 동양 여자아이 네 명이 금빛 의상을 입고 나와 선보이는 중국식 요요 묘기가 외국에서는 굉장히 인기가 높아 이 장면 사진이 홍보물에 많이 쓰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인 서커스'와 비슷하게 여겨질까 봐 일부러 이 장면을 그리 부각시키지 않았다는.

이렇게 '전통적인 서커스'와는 거리를 두려 하지만, '퀴담'은 결국은, 본질적으로 서커스 곡예를 출발점으로 삼은 공연이다. 그러나 그 곡예를 어떻게 배치하고, 포장하느냐가 얼마나 큰 차이를 가져오는지, 뛰어난 작품의 조건은 완전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이미 갖고 있는 것들'을 어떻게 '재창조'하느냐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을, '퀴담'을 보면서 새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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