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최근 BDA, 즉 방코델타 아시아 은행에 동결돼 있던 북한 자금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면, 북한의 막무가내같은 뚝심에 미국이 허덕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6자회담에 참가하기 위해 베이징에 도착하자마자 BDA에 있는 돈을 받아야 영변 핵시설을 폐쇄할 것이라고 말했고, 미국이 BDA의 북한 돈을 풀어주겠다고 발표한 뒤에도 돈이 아직 호주머니에 들어오지 않았다며 미국과의 협상을 사실상 거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BDA 북한 자금 해제는 미국의 패배?
재작년 9.19 공동성명 이후 1년 이상 동안이나 6자회담이 공전되고 북한의 핵실험까지 이르렀던 이유가 바로 이 BDA 문제였습니다. BDA가 돈세탁과 위조 달러 제조 등 여러 불법 행위에 연루돼 있다고 미국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BDA가 북한 자금 2500만 달러의 동결을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그동안 6자회담과 BDA 처리 문제는 별개라는 입장을 보여 왔습니다. BDA 문제는 미국 금융 제도와 관련된 법집행의 문제로서 정치적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또, 그동안 BDA에 대한 조사 결과 북한의 불법 행위가 많이 발견됐다고 한 만큼, 미국의 논리대로라면 이번에 BDA의 북한 자금을 풀어줘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북한이 BDA 자금을 인도적 목적에만 사용하기로 했다는 어설픈 단서를 달아 북한 자금 전액을 풀어줬습니다. 최근 6자회담의 진전 상황을 감안해, 북한에 대폭 양보하는 정치적인 타협의 방안을 택한 것입니다. 아마도 북한은 지난해 핵실험이 북미 관계 정상화의 길을 열고, BDA 동결 자금을 해제시키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자평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북, 원하는 길을 가고 있나?
그렇다면, 북한은 지금 자신들이 원하는 길을 가고 있을까요?
BDA 문제에서의 북한의 단기적인 승리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앞길은 장기적으로 볼 때 그리 밝지 않아 보입니다.
북한의 앞길이 밝지 않은 이유는?
지금 상황으로 볼 때, 북한이 앞으로 처하게 될 길은 크게 두 가지 중의 하나로 보입니다.
첫째, 지금의 6자회담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돼 핵 문제가 해결되고 북미 관계의 완전한 정상화로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미국이 ‘정치적 패배’, ‘외교적 실수’라는 말을 들어가면서까지 BDA 문제를 해결해준 것을 보면, 북한 문제를 외교적으로 풀어가려는 미국의 의지가 강한 만큼 이러한 방안은 현실화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북미 관계의 정상화와 이후 이어질 북한의 국제사회로의 편입이 북한 체제의 유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지는 미지수입니다.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바라는 이유가 체제의 안전을 담보받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 북한 체제는 북미 관계 정상화 이후 불어닥칠 개방의 파고에 가장 약한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김일성을 신격화 시키면서 몇 십년 이상을 김일성-김정일 유일 지도체제를 유지해 온 북한에 외부사조가 유입될 경우 북한 체제의 내구력은 심각한 위험에 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즉, 북한은 북미 관계 정상화를 통해 국제적 고립에서 탈피하고자 하지만, 그러한 고립 탈피가 경직된 북한 체제에 오히려 독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북한이 처할 수 있는 두 번째 길은 지금의 6자회담 과정이 중간에 좌초하면서 다시 대북 제재의 국면으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미국이 이렇게까지 전향적으로 대북 관계를 개선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회담이 좌초돼 대북 제재 국면으로 전환된다면, 미국의 대북 강경론은 지금까지의 그 어느 때보다 드세질 것입니다. 또, 한국이나 중국도 미국이 그동안 기울인 노력을 알고 있는 이상, 대북 제재에 동참하지 않을 명분이 없어집니다.
다시 말해, 미국이 지금 협상에 기울이고 있는 노력 만큼, 북한에 대한 제재 수위는 함께 올라가고 있습니다. 미국이 협상에 적극적인 만큼, 협상이 깨질 경우 북한이 안게 되는 위험은 더욱 더 커지고 있는 셈입니다.
북, 되돌릴 수 없는 길을 가기 시작
결국, 북한은 지난해 핵실험 이후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이 걸어가고 있는 담벼락의 한 쪽 편에는 북미 관계 정상화와 개방의 폭풍이, 다른 한 쪽 편에는 핵실험 이후보다 더 한 국제 사회의 제재가 놓여 있습니다.
북한은 양쪽 편 가운데 한 쪽을 선택할 수 밖에 없겠지만,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 결과는 지금의 북한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즉 지금까지처럼 그저 그렇게 분단 체제에 안주하면서 김일성-김정일의 왕국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얘깁니다.
아마 머지 않아 한반도의 분단 체제가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격변의 시기가 올 지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그러한 시기가 온다면 그 시작은 북한이 지금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핵실험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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