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운이 없었다.
우리 대표팀 타선은 어제 출루율 0.324, 장타율 0.459를 기록했습니다. 역사적으로 OPS 0.783을 기록한 팀은 경기당 평균 5점 정도를 냅니다. 즉 어제 경기에서 우리 대표팀은 5점 정도를 내야 정상이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번트 실패, 병살타 등 지뢰가 그렇게 고르게 매설돼 있는데 장사 없지요.
타자들의 '작전 수행 능력'을 꼬집은 기사들이 많은데...전 잘 모르겠습니다. 어제 출전한 야수들 중에 평소에 '작전 수행 능력'이 모자란다고 평가 받는 선수는 이대호 한 명 뿐입니다. 즉 작전 수행 '능력'이 모자랐던 게 아니라, 작전 수행이 안 되었을 뿐이죠.
'집중력 부족'도, 패배의 이유로 꼽기에는 지나치게 주관적이라는 생각입니다. 평소에 많은 야구인들은, 야구는 지나친 투지보다는 평상심이 더 중요한 스포츠라고 말합니다. 4회 무사 1루에서 박재홍이 '집중력이 모자라서' 병살타를 쳤다고 보기에는...흠...지나친 결과론 같습니다.
하필 번트는 투수 앞으로 굴러가고, 잘맞은 타구는 야수 정면으로 갔을 뿐입니다. 우리 타선이 5점을 못낸 이유는, 야구의 신이 계속 나쁜 패만 줬기 때문입니다.
2. 이제 대만에게는 운이 안 따라 주면 진다.
제가 최홍만 선수와 이종격투기 한판 승부를 펼친다면? 제가 해리포터가 졸업한 호그와트 마법학교라도 다니지 않는한 승부는 뻔할 겁니다. 즉 '최홍만 vs 이성훈'의 승부는 전력의 차가 너무 커서 '운빨'이 작용할 수 없습니다. 98년 방콕 아시안게임 때 한국과 대만의 승부도 딱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고교 야구팀의 숫자가 우리의 세 배 이고, 최근 메이저리그 진출도 우리보다 더 활발한 대만 야구는 더 이상 한국의 밥이 아닙니다.
2006 한국 프로야구 최강팀 삼성은 LG에게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습니다. 18번을 싸워 무려 13번을 이겼지요. 하지만 삼성도 '운이 없던' 다섯 번의 경기는 졌습니다. 제 눈에, 한국 대표팀과 대만 대표팀의 전력차는 삼성과 LG의 차이보다는 적어 보입니다.
2009년 2회 WBC에서도 아시아에는 두 팀의 본선 티켓만 주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대만과의 진짜 진검 승부는 그때 펼쳐지게 되겠지요.
3. '가능한 한' 최강팀을 뽑아야 한다
메이저리거 다 부르고, 김동주도 왔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병역 혜택 중요하고, 병역 미필자 위주로 뽑아야 하는 것 맞습니다.
그런데 한국 대표팀은, 병역 해결 되지 않는 한국 국적의 최고의 타자 한 명이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오래 뛴 선수들이 다른 나라들에서 뛰고, 또 일본-멕시코 등에서 활약한 선수들이 미국으로 진출하며, 리그 간 수준의 '통계적-객관적 비교'가 어느 정도 가능해 졌습니다. Clay Davenport가 고안한 'DT : Davenport Translation'이라는 시스템은, 이런 서로 다른 시대-지역의 리그에서의 성적이 현재 메이저리그에서는 어느 정도의 기록인가라는 계산해 내는 시스템입니다. 가령 2002년 요미우리에서 타율 0.301, 40홈런을 기록한 마쓰이의 성적은 0.299라는 EqA로 표현됩니다. (EqA는 Equivalent Average의 준말입니다. 타율이랑 비슷한 숫자로 보이는데, 출루-장타 능력을 포함한 종합적인 공격능력을 보여줍니다. 역시 0.300 근처면 뛰어난 성적입니다. 올시즌 메이저리그에선 푸홀스가 0.355로 최고의 EqA를 기록했습니다)
WBC를 앞두고, Davenport가 DT 시스템을 이용해서, 한국 타자들의 EqA를 구한 적이 있습니다. 2005년 최고는 김태균의 0.284였습니다. 김동주와 이병규가 0.267 정도를 기록했습니다. (파크 팩터까지 고려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아닐 것 같고, 김동주와 이병규의 파크 팩터까지 감안한 EqA는 0.275 정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추신수의 2006년 클리블랜드에서 EqA는 0.299입니다.
추신수가 '실력이 없어서' 못 뽑힌 게 아니라는 걸 생각하면(김재박 감독을 비롯한 야구계 인사들의 중론은 '국내 야구를 지킨 선수들을 우선한다'였습니다), 그리고 추신수가 '탑 클래스 유망주'로 평가받는 동안, '그냥 괜찮은 내야 유망주' 정도로 인식됐던 첸융지에게 홈런 두 방을 얻어 맞는 걸 보면...
'해외파 빼고 해도 대만은 이긴다'라는 생각이 얼마나 안이했는지를, 14명의 젊은 선수들의 야구 인생을 베팅하고서야 깨달은 셈입니다.
4. 단기전의 특성
Baseball Prospectus의 Dan Fox의 연구에 따르면, '투수와 타자가 처음 상대했을 때, 투수가 유리하다'라는 야구계의 속설은 사실이라고 합니다. 2000년부터 2005년 사이에, '첫 만남'의 투-타 대결에서는 OPS가 0.736이었고, 두번째 만남부터는 0.759로 올라 갔습니다. 차이가 매우 작지만, 이런 작은 차이도 최대한 활용하려는 게 야구에서의 작전과 용병술입니다.
경기수가 제한되고, 대부분의 선수들이 상대방을 처음 만나는 단기전에서 이런 효과는 극대화될 수 있습니다. 불과 8개월 전, 한국 투수들이 애너하임에서 미국의 강타선을 단 3점으로 묶었던 기적 역시 이 '첫 만남 효과'가 이유가 되었을 겁니다. 당시 미국 4번타자였던 치퍼 존스는 네 명의 서로 다른, 처음 보는 투수들을 상대해야 했었죠.
4-5회에 무너진 손민한을 보며, WBC 때의 투수 기용법이 아쉬웠던 건 저만이 아니겠지요.
5. 지나친 스몰볼은 독이다
한국 야구 지도자들은 스몰볼을 좋아합니다. 아니, 좀 과장하자면 전세계적인 현상 같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들의 권한이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2005년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홈런으로 점수 뽑는 비율'이 가장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스몰볼'이라고 소문나고 칭송받았던 것도, '스몰볼'을 선호하는 주류 야구계의 시각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번트는 대부분의 경우 '기대 점수치'를 떨어 뜨립니다. 이건 의견이 아니라 수없는 통계적 연구를 통해 입증된 팩트입니다. '김재박의 현대'는 번트 '때문에' 잘한 게 아니라, 그 수많은 번트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출루율과 장타율 때문에 좋은 성적을 냈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성공한 번트가 그럴진데, 어제 경기처럼 실패한 번트는 두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야구는 점수를 많이 내고, 적게 줘야 이기는 경기입니다. 공격은 점수를 '내는게' 목적이 아니라, '많이 내는게'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많이 살아 나가고-한번 칠때 가능하면 장타를 치는 겁니다. 번트는 그 가능성을 압살하는 방법입니다.
선동열 감독의 '디펜스 개념'과 김인식 감독의 '오펜스 개념'이 만나는 팀이 좋은 성적을 낼 겁니다. (하필 그 두 지도자가 각 영역을 책임진 팀이 WBC 한국 대표팀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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