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짧아졌다 하더니 정말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후다닥 지나버리고 이제는 두꺼운 외투에 목도리로 무장을 해도 어깨가 절로 움츠러드는 겨울의 문턱에 들어섰네요. 저는 몸이 뜨겁고 땀이 많은 체질이라 여름보다는 겨울을 좋아했고 집사람이 난방을 트는 족족 에너지 절약을 내세우며(사실은 더워서) 잠가버리고는 했는데 이제 나이 탓인지 발과 무릎이 시려와 먼저 자발적으로 난방꼭지 트는 데 주저함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지난주 개봉영화 가운데는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과 '누가 그녀와 잤을까' 두 편의 섹스코미디 영화가 수능 특수를 누리며 1, 2위를 차지했습니다. 이번 주에는 9편의 영화가 개봉되는데 특색있는 영화들이 많은 편입니다.
디파티드
홍콩 느와르의 부활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유위강 감독의 '무간도' 시리즈는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 브래드 피트가 리메이크 판권을 사들였는데 연출은 거장 마틴 스코시즈가 맡았습니다. 거장 감독인지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맷 데이먼, 잭 니콜슨 등 주연 뿐 아니라 조연진들도 화려합니다. 마틴 쉰, 알렉 볼드윈, 베라 파미가, 마크 월버그 등 다른 영화에서라면 주연을 맡았을 만한 배우들이 선보입니다.
무간도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은 경찰에 잠입한 폭력조직원과 범죄조직에 잠입한 경찰의 엇바뀐 운명을 통해 현대인의 정체성 위기라는 화두를 생각해 하는 멋진 시나리오입니다. 절대악과 절대선의 구분이 모호해 인물에게도 편향됨 없이 공통된 연민(이번에 들키지 마라 제발! 하는 심정)을 느끼게 하는 효과가 극대화 되는데요. 원작의 기본 얼개를 마틴 스코시즈는 다시 창조적인 변주를 가했습니다. 악당 두목 역의 잭 니콜슨이 바로 그 중심인데 원작보다 비중이 훨씬 강화돼 인물의 악마성이 맘껏 부각됩니다. 역시 잭 니콜슨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인데 원작에서 이용식 씨와 비슷한 단구에 목 짧은 홍콩배우가 미스 캐스팅이지 않았나하는 뒤늦은 의문을 품게 할 정돕니다.
물론 잭 니콜슨의 최후나 다소 생뚱맞아 보이는 마지막 결말 처리는 거장의 솜씨답지 않은 미흡함이 드러나지만 '갱스 오브 뉴욕'이나 '애비에이터'에서 맛봤던 실망보다는 훨씬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삼거리 극장
뮤지컬이나 뮤지컬 영화는 화려한 춤과 노래, 볼거리를 바탕으로 하고 당연히 많은 예산이 들어가는 장르인데, 올 부천 영화제 개막작이었던 삼거리 극장은 10억 원이라는 경이로운 저렴한 제작비로 만들었습니다.
여고생 소단이 집나간 할머니를 찾기 위해 찾아온 삼거리 극장. 매표원 아가씨와 청소부 아저씨, 뚱뚱한 매점 아줌마들이 밤이 되면 혼령으로 되살아나 그들만의 쇼를 벌이는 이상한 극장입니다. 변두리에 위치하고 낡은 시설 때문에 손님도 들지 않아 극장은 곧 헐릴 위기에 처하고 소단과 혼령들은 극장을 되살리기 위해 묘안을 짜냅니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음울하고 독특한 정서로 컬트영화나 매니아 영화로도 분류될 수 있을 정도로 색다른 맛과 느낌을 줍니다. 천호진을 제외하고 다른 배우들은 무명이지만 연극과 뮤지컬에서 능력을 검증받은 실력있는 배우들입니다. 연기 뿐 아니라 춤과 노래도 탁월해 많은 예산을 들이고도 흥행에 쓴 맛을 봤던 '구미호 가족'에서 유명 배우들의 어색한 춤과 노래보다는 훨씬 뛰어납니다.
모두 창작곡인 9곡의 노래들은 독특한 가사와 멜로디로 탄탄한 반주와 어울려 처음 듣는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습니다. 전개과정에서 다소 무리한 설정이나 설득력이 부족한 부분이 눈에 띄지만 영화 전체의 이미지를 손상시킬 만큼은 아니고 영화 속 영화인 '소머리 인간 미노수 대소동'은 변사의 구수한 입담으로 진행되는 무성영화인데 그때 그 사람들이 왜, 어떻게 무성영화에 울고 웃을 수 있었는지를 알게 해줄 만큼 재미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똥싸는 소리'라는 노래가 제일 좋았고, 소단이와 혼령들이 벌이는 만찬 장면과 귀신 소동에 실려나가는 관객과 조사를 받으러 극장 주인이 경찰에 호송되는 장면은 압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나물에 그 밥인 요즘 기획 영화에 식상해 뭔가 색다른 것을 찾는 관객들에게 '강추!'인 영화입니다. (영화의 실제 무대였던 부산의 삼일극장이 철거된다는 소식이 들려오니 이 영화가 마지막 고별무대인 셈이 됐네요.)
디어 평양
재일동포 2세인 양영희 감독이 조총련 고위 간부를 지내며 세 아들을 모두 북송사업의 일환으로 북한으로 보낸 아버지와 어머니 가족들을 10년에 걸쳐 지켜보며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감독 자신은 이런 부모님 밑에서 조총련 학교를 다니며 성장했지만 자유로운 일본의 분위기도 함께 맛보며 자라 이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고 서로 사이가 냉랭해 식사도 같이 안하고 대화도 없이 지내다가 카메라를 매개로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열며 이해의 폭을 넓혀가는 부분이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감독은 듬직한 체구에 선한 눈매를 가진 제주도 출신 재일동포가 무엇 때문에 한평생을 조총련 사업에 바치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아들 셋을 줄줄이 북한으로 보냈는지가 가장 큰 의문이라고 했습니다. 영화에는 평양에 사는 오빠네 가족들의 사는 모습과 반공교육을 충실하게 받은 사람이라면 무시무시하게 들리는 북송선 ‘만경봉호’의 내부 모습 같은 희귀한 광경도 등장합니다.
반주로 맥주 한 잔 걸치고 카메라를 든 딸과 주고 받는 대화는 자연스럽기 그지 없고 푸근하고 평범한 그래서 귀여울 정도로 사랑스러운 아버지 모습입니다. 오빠네 가족들에게 부족한 학용품과 생필품을 싸서 보내주는 게 삶의 가장 큰 낙인 어머니의 쫑알거리다가 ‘하하하’하는 웃음으로 끝맺는 추임새도 인상깊습니다. 뚜렷한 직장없이 조총련 활동가로 생활했던 아버지 대신 이를 악물고 돈을 벌며 고난의 세월을 보낸 사람이 이른 달관의 경지 같았습니다. 갈등을 극복하고 완전한 화해를 이루는 극영화라면 택했을 법한 결말이 아니라 '이제는 그때의 아버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감독의 나레이션은 다큐멘터리만이 보여줄 수 있는 생생한 감동을 전해줍니다. 양 감독과의 인터뷰는 다음번 뉴스레터에서 자세히 전해드리겠습니다.
세 번째 시선
국가인권위원회가 영화를 통해 인권의식을 돌아보겠다고 기획한 프로젝트의 세 번째 시리즈입니다. 장윤철 감독 등 7명의 감독이 만든 6편의 영화는 외국인 노동자, 가사 노동을 둘러싼 부부간의 갈등, 소녀 가장에 대한 사회의 비뚤어진 시선, 생일파티에 영어학원 선생님 딸을 데려왔는데 이 딸이 백인과 흑인 사이에 태어난 까만 소녀라는 사실 때문에 벌어지는 소동,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 등 우리 사회의 그늘 속에서 살고 있는 소수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담고 있습니다.
이밖에 할리우드의 드림웍스와 영국의 애니메이션 명가 아드만 스튜디오가 함께 만든 '플러쉬'와 김래원이 꽃미남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생생하고 남성적인 연기를 선보이는 '해바라기', 스페인 젊은이들의 체인징 파트너에 버금가는 발칙한 연애담을 그린 '연애의 기술',힙합청년과 발레리나의 사랑을 그린(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 한 설정?) 청춘 댄스 영화 '스텝업' 등이 개봉됩니다. 즐겁고 행복한 주말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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