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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훈 "심신부터 동방신기까지 동료"

16년간 한결같은 신승훈의 음악인생 뒷얘기

SBS뉴스

작성 2006.10.29 09:50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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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7장 연속 밀리언셀러, 16년간 9집까지 판매량 총 1천400만장, 고속도로에 깔면 서울과 부산을 약 5번 오간 거리인 1천960km. 수상 트로피 700개, 공연 횟수 700여 회, 10년간 1위를 가장 많이 한 가수·작곡자 각 1위.

유재하 1집에 '작사·작곡 유재하'라고 적힌 게 너무 멋있어 보여 곡을 쓰기 시작했다는 신승훈. 1990년 11월1일 유재하의 기일에 데뷔한 신승훈이 최근 10집 '더 로맨티시스트(The Romanticist)'를 발매했다.

데뷔곡부터 '떴으니' 고생은 해봤을까. '국민 가수' '발라드의 황제'란 칭호는 언제부터 생겼을까. 왜 데뷔 이래 단 한편의 CF에도 출연하지 않은 걸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일까' '돈은 얼마나 벌었을까'.

심신·윤상과 트로이카로 불리던 데뷔 시절부터 동방신기와 활동하는 지금까지, 그의 무대 인생 16년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어봤다.

◇방송 운 없던 데뷔 시절

대전 은행동 카페 골목 통기타 가수 시절, 이때 받은 팬레터만 하루 7천 통, 데뷔 직후 팬클럽 인원만 20만 명. 90년 1집 발매 직후 방송 노출도 안된 '미소 속에 비친 그대'는 '짝퉁' 테이프를 파는 리어카에서 매일같이 울려퍼졌다. 그러나 '촌티'를 벗지 못했단 이유로 당장 신승훈에게 방송 출연 기회는 오지 않았다. 이듬해 3월이 돼서야 '그날'이 왔지만 운도 따르지 않았다.

서울 테헤란로 모텔에 살던 신승훈은 첫 방송인 KBS '연예가중계' 출연 당일 결막염에 걸렸다. 그 여파로 이튿날 MBC '퀴즈 아카데미' 제주도 편 출연까지 취소됐다. 20위권에 처음으로 진입한 MBC '여러분의 인기가요'도 사담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다음주 이상우의 '그녀를 만나기 100m 전'과 1위 후보에 올랐지만 고르바초프의 제주도 방문으로 연이어 결방됐다.

"1위 후보에 올랐지만 차가 없어서 택시를 타고 방송국에 다녔어요. 노래가 히트해 사람들이 절 알아보는데, 무척 민망했죠. 메이크업도 물론 직접 했고요. 지금처럼 좋은 차에 코디네이터가 어디 있어요~."

그러나 데뷔 음반부터 밀리언셀러(140만장)를 기록한 그는 KBS '가요 톱 텐' 5주 연속 1위로 골든컵을 수상했고, 골든디스크상도 신인상이 아닌 본상을 받았다. 향후 펼쳐질 '대박' 퍼레이드의 서막이었다.

◇3대가 좋아한 '국민가수'

91년 2집 '보이지 않는 사랑'의 반응은 신승훈을 깜짝 놀라게 했다. 1집으로 10~20대 젊은 층에 어필한 데 이어 158만장을 판 2집으론 60대에까지 이름 석 자를 퍼뜨렸다.

"당시 한 신문에서 '한 집에 10대 딸, 40대 어머니, 60대 할머니까지 3대가 신승훈 팬'이라며 '이 정도면 국민 가수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라고 보도했어요. 이때부터 언론에서 '국민 가수'란 칭호를 쓰더군요. '보이지 않는 사랑'은 SBS '인기가요'에서 14주 연속, MBC '여러분의 인기가요'에서 12주 연속 1위를 했습니다. 스스로 감당 못할 정도의 인기였죠."

이때 그는 비슷한 시기 등장한 신인인, '오직 하나뿐인 그대'의 심신, '이별의 그늘'의 윤상과 트로이카로 불렸다. 그러나 신승훈만이 지금껏 가수로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발라드의 귀공자'에서 '황제'로

3·4집은 그에게 독보적인 지위를 안겨준다. 93년 3집 '널 사랑하니까', 94년 4집 '그 후로 오랫동안'이 각각 170만장, 180만장씩 판매되자 대중과 가요계는 전곡을 작사·작곡하는 싱어송라이터인 그를 인정하자는 분위기가 됐다.

"노래만 하고 싶단 생각에 3집 땐 방송 활동도 거의 하지 않았어요. 전국 14개 도시를 돌며 투어를 했죠. 4집을 낼 때는 마음을 비웠어요. '세 번 잘됐는데 네 번까지 잘되랴'하는 마음이었죠. 기대를 접었던 4집이 터지자 '발라드의 귀공자'란 타이틀이 붙었어요."

96년 5집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 발매 전, '신승훈 시대는 끝날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5집은 그의 음반 중 가장 많은 판매량인 247만장을 기록했다. 이때부터 '발라드의 황제'로 입성, 10년간 타이틀이 따라다니고 있다. 당시 신승훈의 음반 유통사 앞에는 신보를 빨리 받아가려는 트럭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신승훈의 음반을 불법으로 제작하던 공장이 적발돼 뉴스를 장식하기도 했다.

◇CF 출연은 16년간 0번

그의 음악은 '신승훈식 발라드'란 이름으로 90년대 트렌드의 중심에 섰다. 기업·초콜릿·청량음료 등 TV 광고도 80여 개가 쏟아졌다. 처음 광고 제의를 받은 것은 홍콩 배우 왕쭈셴(王祖賢)이 선전한 우유탄산음료 '크리미'. 이 광고 출연을 거절한 이래 그는 16년간 단 한편의 광고에도 출연하지 않았다.

"만약 이걸 다 했으면 지금쯤 돈 많이 벌었겠죠. 전 사랑·이별 등 주로 슬픈 노래를 부르는 가수였어요. 이때는 '시원해요' '달콤해요' '튼튼해요'라는 카피의 직접 광고가 주를 이뤘죠. 노래하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싶었고 CF의 속성상 대중이 보기 원하지 않을 때도 모습을 드러내야잖아요. 공연은 저를 보고 싶을 때 대중이 찾아오는 거니까. 제 철학을 아는 소속사(라인음향)도 '터치'를 안했어요."

그러나 그는 "이젠 소외된 이웃을 돕는 것과 연계된 광고라면 출연하겠다"며 "또 요즘은 제품을 직접 홍보하지 않는 간접광고를 하더라"고 했다.

◇신승훈의 역사에 남을 명장면

신승훈에겐 불행하면서도 행복한 기억이 있다. 96년 11월 미국 뉴욕 카네기홀 공연이 무산됐을 때. 카네기홀엔 포스터로 도배가 됐고 공연 당일 기자회견까지 했다. 그러나 티켓을 판 업체가 돈을 들고 도망갔다. 이들은 만약 신승훈이 공연장에 나타나면 총으로 쏴버리겠다는 협박까지 했다. 공연은 취소됐고 그는 길게 줄선 팬들을 일일이 안아주고 뒤돌아섰다.

"마음에 걸렸어요. 인근 한국 식당 거리를 뒤져 삼삼오오 흩어진 팬 15명을 모아 카네기 노래방에 갔어요. 5시간 동안 비행기 타고 버지니아에서 온 팬, 신혼 부부 등만을 위해 '보이지 않는 사랑' 등 7~8곡의 히트곡을 위해 불러줬죠. 그때 '내가 정말 잘했구나'란 생각에 행복했어요."

2000년 8월 서울 올림픽공원 88잔디마당에서 열린 전국투어 서울 앙코르 무대도 잊을 수 없다. 공연 당일 폭우가 쏟아졌다. 취소하자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는 공연을 강행했다.

"비 오는 날 누가 오겠냐고 스태프가 난리였어요. 하지만 1만 명이 넘는 관객이 폭우 속에서도 제 노래를 따라부르며 자리를 지켜줬죠. 노래한 보람이 있구나 그때 처음 느꼈어요. 울컥했죠."

◇"의리 하나는 최고"

신승훈은 소속사와 연예인의 법정 소송이 끊이지 않는 요즘의 젊은 스타들과는 다르다. 흥행 보증 수표였던 그는 수많은 솔깃한 제의에도, 계약서도 제대로 없이 10년간 라인음향에 몸담았다. 1집 때 장당 인세 100원, 2집 200원, 3집 300원, 4집 400원, 5집 500원. 명성에 걸맞지 않는 대우였다.

"전 당시 걸어다니는 기업으로 불렸지만 인세를 올려달라고 한 적도 없었어요, 저만 잘나서 뜬 게 아니잖아요. 자기를 처음 키워준 사람을 배신하고 잘된 사람 못 봤거든요. 또 제 철학이 '돈을 좇으면 돈이 안 생기고, 일을 좇아야 돈이 생긴다'는 주의랍니다. 지금은 돈을 벌었고 큰 집도 마련했죠. 언젠가부턴 물건 값을 깎지 않는 절 발견했습니다(웃음)."

1999년 홀로서기를 시작하며 도로시뮤직을 설립하고 2002년 8집부터 직접 제작을 시도, 지금에 이른 그는 "앞으론 노래할이라며 "신승훈과 친구들이란 콘셉트의 공연도 기획할 것이다. 이젠 팬들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줄 책임감으로 노래한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