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 때문에 추석 개봉작 두 편의 기자시사회를 놓쳤습니다. [가문의 부활]과 [라디오스타]인데 앞의 것은 추석대목을 노리는 코미디 기획물로,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지만 [라디오 스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돌아와서 주변에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내 인생 최고의 영화'라거나 '영화계에 발 들여놓고 나서 본 최고'라는 극찬을 해서 궁금증은 더욱 증폭됐고 주말을 이용해 아들 녀석과 함께 일반시사회를 통해 봤습니다.
비록 서 너 달 만에 [괴물]에 추월당하기는 했지만 [왕의 남자]로 한국영화 흥행사를 다시 쓴 바 있는 이준익 감독의 차기작이고, 또 한국영화의 대들보라고 할 수 있는 안성기, 박중훈 콤비가 나오고, 영화 내용이 이제는 한물간 매체로 취급받는 라디오 DJ를 다룬다고 해서 제작 때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개봉시기인 추석 시즌은 전통적으로 한국영화가 강세를 보이는 시즌이라 할리우드 검객들은 자취를 감추고 내로라하는 한국영화 강호의 검객들이 일합의 진검승부를 펼치는 시기입니다. 송해성 감독에 강동원, 이나영 주연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지난주 개봉해 20대 여성관객을 중심으로 지지를 받으며 극장을 눈물바다로 만들고 있고, 이번 주에는 3시즌 연속 홈런을 노리는 조폭코미디 [가문의 부활]과 박인환, 최주봉 등 노익장을 과시하는 [무도리]가 나란히 개봉됩니다. 대망의 추석 연휴 시즌인 28일에는 [라디오스타], [타짜], [잘 살아보세], [구미호 가족] 등 네편의 한국영화가 일합을 겨룹니다.
이번 추석연휴는 개천절 휴일과 맞물려 이틀 빠진 일주일 연휴라서 절대적인 관객 수도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계 사람들은 사나흘 추석연휴에 보통 골라서 한편을 보는 패턴이었다면 이번에서는 2-3편 관람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강호 고수들의 진검승부 결과가 어떨지 궁금해지는 가운데 저는 개인적으로 [라디오스타]에 한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88년 가수왕 최곤(박중훈)은 왕년의 화려한 시절을 뒤로하고 지금은 미사리 카페에서 호구지책으로 노래하고 있는 신세입니다. 왕년의 인기는 식었지만 그 당시 못된 성질은 그대로여서 지금도 툭하면 사고를 칩니다. 그의 20년 매니저 박민수(안성기)는 이런 최곤의 치닥거리에 진땀을 흘립니다. 아내는 변두리에서 자그만 김밥집을 열어 연명하고 있지만 민수는 최곤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최곤이 다시 한번 사고를 치고 막다른 벼랑에 몰렸는데 그에게 원주로 통폐합을 앞둔 영월방송국 DJ 자리가 제의되고 매니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받아들입니다.
아직도 과거의 영화를 못 잊고 사는 최곤은 '내가 가면 영월 방송국 직원들이 긴장해서 일이나 제대로 하겠냐'며 시대착오적인 투덜거림 내뱉으며 영 내켜하지 않습니다. 영월방송국은 자체 방송을 안 한지가 10년도 넘어 방송기기에는 두터운 먼지가 앉아있고 엔지니어는 기계를 오랜만에 다뤄 서투르기 그지 없습니다. 여기에 원주방송국의 3년차 PD가 방송사고를 치고 좌천당해 내려와 최곤 프로그램을 맡게 됩니다.
애당초 학업에 뜻이 없는 최곤이지만 그래도 폼나보이려고 후배 가수에게 축하전화를 부탁했다가 생방송 전화연결을 통해 매니저가 꿔간 돈 갚으라는 항의를 듣기도 합니다. 방송에 대한 애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이기에 다방 종업원을 마이크앞에 앉히기도 하고, 중국집 배달원이 일일 DJ가 되는 등 아슬아슬한 하루를 보냅니다.
하지만 작은 동네 영월에 최곤의 오후의 희망곡은 잔잔한 혁명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이런 성공은 최곤의 프로그램이 서울로 올라가 전국에 송출되는 기회로 찾아오고 7080 세대의 구매 욕구가 남아있는 마지막 기회라며 최곤을 다시 팔겠다는 연예기획사도 등장하지만 이런 기회는 최곤과 박민수에게는 결별의 위기로 작용합니다.
왕의 남자도 민중의 입장에서 궁궐을 들여다보고 한껏 조소하는 시각을 보여줬듯이 이 영화도 철저하게 루저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준익 감독이 '주류가 부러워하는 비주류'를 언급했듯이 루저들을 소재로 화끈하지는 않지만 따뜻하고 은은한 감동의 향기를 훌륭하게 비벼냅니다. 좋은 영화라는 것이 많은 자본과 지식, 세련된 테크닉, 화려한 볼거리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진리를 보여줍니다. 이준익 감독은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위에서 인간에 대한 따뜻한 가슴을 갖고 있고 그것을 영화로 풀어내는 능력이라는 삼박자를 두루 갖췄습니다.
이 영화는 다른 영화들이 흔히 채택하는 럭셔리한 장소나 소품이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보통사람들이 접하기 어려운 장소나 소품들을 등장시켜 화면의 때깔을 입히고 볼거리를 제공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하지만 [라디오스타]는 기껏해야 주인공이 타는 낡은 벤츠와 방송국 간부의 말쑥한 모습 정도라고나 할까요. 낡고 자그만 방송국, 시골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허름한 여관, 순대국집, 김밥집, 다방, 철물점, 세탁소가 등장하고 영월방송국의 점심 단골메뉴는 짬뽕도 아닌 자장면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박중훈, 안성기라는 두 배우의 조합입니다. 안성기는 아역배우부터 시작해 연기생활 50년으로 7-80년대 원톱 배우로 한국영화의 주연을 독차지하다시피 했고, 이후 자신에게 맡는 역이면 조연도 가리지 않고 롱런하는 국민배우입니다. 박중훈은 80년대 청춘스타로 떠올라 코믹하고 활발한 이미지로 활동하다가 [찰리의 진실]이라는 작품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한 배우 1호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또 이 둘은 [칠수와 만수], [투캅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나란히 호흡을 맞추기도 했고 이번 작품은 공동 출연으로 네 번째 작품입니다.
박중훈은 최곤의 궤적과 비슷한 부분이 있고, 자신도 청춘스타 시절에 최곤처럼 좀 '까칠한' 성격이어서 몰입을 잘 할 수 있었고 영화를 찍으면서 인생을 배울 수 있었다고 했고 안성기는 오랜만에 자기에게 어울리는, 또 힘빼고 자신의 모습을 가장 많이 드러내는 연기를 했다고 합니다. 또 어린아이가 칭찬해 달라고 조르듯이 영화에 만족한다고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소박하고 평범한 우리 주변 사람들의 모습에서 삶의 진정한 가치를 느끼게 해주고 성공가도를 달리느라 각박하고 냉정해지는 껍질 밑에 감춰져 있는 인간의 따뜻한 온기를 스멀스멀 스며나오게 하는 마법을 부립니다. 조연뿐 아니라 잠시 스쳐지나가는 단역배우 하나하나에도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습니다. 영화에는 처음 출연하는 '노 브레인'의 시끌벅적한 오바연기도 밉지 않습니다. 엔딩의 여운도 오래 남습니다. 밥과 나물같은 재료의 엄선, 적절한 조리법과 양념의 배합, 거기다가 요리를 내오는 타이밍까지 균형을 맞춰 놓았습니다.
'이런 인생관이 있는데 당신! 이게 옳거든! 내말이 맞거든!' 하는 악다구니와는 거리가 먼, 강요하지 않으면서 커다란 설득력으로 조곤 조곤 이야기합니다. 중간 중간 터지는 힘 뺀 코믹 연기와 조연 배우들의 조화로운 연기 등 장점이 많은 영화입니다. 당신을 언제나 최고라고 말해주는 옆 사람이 소중하다는 메시지, 이번 연휴 때 여러분 주변의 공기와 같은 존재로 계시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보면 좋은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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