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이젠하워의 역사적 의의
오늘날 중동 분쟁은 이스라엘과 이슬람 아랍권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빚어진다. 여기에 세계의 경찰 미국이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편에 서는 정책을 취하면서 문제가 더욱 복잡해지는 양상이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도우면서 한편으로 자신만의 목표도 달성해 나간다. 결국, 중동분쟁의 키를 미국이 쥐고 있다고 보면 된다. 지금 부시정권의 방향성이 갈등 국면으로 치닫는 것이지만, 미국이 자신의 지배적인 이익 관철을 위해 꼭 갈등만 유도해 온 것이 아님을 카터와 클린턴의 예를 통해 확인해 봤다. 여기에 한 명 추가해야할 인물이 있다. 1953년 1월부터 1961년 1월까지 미국의 대통령을 지낸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다.
맥아더, 패튼과 함께 독일에 맞선 미국 2차 세계대전 승리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아이젠하워는 공화당에 텍사스 출신이란 점에서 부시 부자(父子)와 교집합 되는 부분이 많다. 더구나 군대 문턱에도 갖다 오지 않은 현 부시 대통령과 달리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직접 2차 세계대전까지 치른 아이젠하워가 혹시 이들보다 더 과격한 극우주의자가 아닐까 하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 그러나, 맥아더의 참모를 거쳐 2차 세계대전 중 1942년 북아프리카 방면 연합군 사령관, 1943년 유럽 연합군 사령관, 1945년 미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경력만 보지 말고, 그가 1948년 컬럼비아대학교 총장을 지냈음을 눈여겨봐야 한다. 곡학아세하는 일부 학자를 제외하고 진정으로 학문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평화를 세계관의 중심에 놓기 마련이다. 밝은 성격에 부드러운 인상으로 포용력이 컸던 그가 남긴 업적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바로 이 평화, 지구촌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끝없이 노력한 점이다.
전임 트루먼 대통령이 2차 세계대전을 마무리 하며 2번 대통령을 지냈지만, 명실상부하게 전후 지구촌을 소련과 양분한 채 자유 민주주의 진영을 이끈 세계 경찰 미국의 대통령은 아이젠하워가 그 첫 시작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수 있다. 따라서, 지구촌 경찰로 등장한 초기 미국의 모습이 요즘과 얼마나 달랐는지 들여다 보고, 다시 이상적인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는지 모색하는 작업은 무척 소중하다. 예측할 수 있는 상당기간 미국이 지구촌의 맏형노릇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민족의 생존이 걸린 한반도에서 미국이 행사할 막대한 권한과 지대한 이익의 크기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편견에 사로잡혀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미국 강경파를 일방적으로 추종만 할 게 아니라, 양심적이고 이성적인 미국인과 협력해 바람직한 미국의 위상을 견인해야할 중차대한 과제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진실과 정의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도 실리를 추구해야하는 한민족의 숙명이 그 이유다.
2) 6.25를 비롯한 지구촌 분쟁에 평화를 선물
우리 한국인은 특히 아이젠하워를 잊으면 안된다. 북한의 침략으로 비롯된 비극적인 6.25를 종결시킨 장본인이 바로 아이젠하워이기 때문이다. 2년 이상 성과없이 지리하게 끌려가던 휴전 협상은 아이젠하워에 의해 마침표를 찍었다. 물론 휴전 회담에 대한 아쉬운 부분이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그래도 동족끼리 총칼 겨누고 죽이던 비극을 끝낸 그 자체의 업적은 과소평가 될 수 없다. 그는 이미 대통령 선거기간 중에 6.25종전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당선된 뒤 당선자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할 정도로 한반도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는 전쟁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그의 강력한 의지를 만천하에 강조한 용기있는 행동으로 높이 평가할 만 하다.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전장(戰場)을 방문해 어깨에 힘 주고 미국의 위대한 승리를 운운하는 유치한 힘 자랑 건달 문화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는 특히, 퇴임 전인 1960년 6월 고희(古稀)를 넘긴 고령으로 4·19 이후 민주주의를 만끽할 것 같던 한국을 다시 방문해 축하하는 애정을 보인다. 비록 이듬해 박정희의 쿠데타로 민주주의는 퇴보하고 말았지만... 그러나, 민주주의는 한국에서만 퇴보한 게 아니다. 아이젠하워의 퇴장과 함께 미국도 본질적으로 변하게 된다.
6·25에 이어 인도차이나 반도의 베트남 독립전쟁도 그의 손에서 휴전 협상이 이뤄졌다. 그러나, 후임 대통령은 달랐다. 왜 달라질 수 밖에 없었는지, 전쟁(2차 세계 대전)을 통해 세계 최강국이 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체질이 바뀔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음에 다룬다. 아이젠하워의 후임 케네디가 암살당한 뒤 등장한 존슨 대통령은 아이젠하워가 애써 일궈 놓은 평화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그는 1963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며 60년대와 7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을 전쟁광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그 덕분에 한국군은 베트남에서 잔인무도한 용맹(?)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고엽제 후유증도 얻고, 참전수당 받아 경부고속도로도 깔았지만...
3) 2차 중동전의 시원, 나세르
아이젠하워가 더욱 돋보이는 이유는 난마처럼 얽힌 오늘날 중동문제를 상당히 이성적인 시각과 가치관으로 해결했기 때문이다. 그의 재임시 제 2차 중동전쟁이 슬기롭게 평화로 갈무리됐다. 갈등과 제국주의로 갈 뻔한 전쟁을 평화로 귀결시킨 전말을 들여다 보자. 오늘날 아이젠하워가 그리워지는 이유가 보인다.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과 1차 중동전쟁을 치른 뒤, 중동에서 중대한 정세변화가 일어났다. 1952년 7월 이집트에서 군사 쿠데타가 발생해 왕정제가 붕괴된 것이다. 이때 나기브 장군이라는 허수아비 우두머리(우리 5·16의 장도영)를 밀치고 나세르(우리의 박정희처럼 뒤의 실세)가 등장해 이집트를 민족색이 짙은 비동맹 자주노선으로 바꿔 놓는다. 1956년 초대 대통령이 된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 국유화]라고 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영국, 프랑스 같은 유럽의 강대국은 물론 이스라엘에 엄청난 피해를 입히며 제 2차 중동전쟁으로 이어진 수에즈 운하 국유화의 이면을 들여다 보자.
박정희보다 1살이 어렸지만, 박정희 보다 9년 먼저 쿠데타를 일으킨 나세르는 쿠데타 2년 뒤인 1954년 [혁명의 철학](The Philosophy of the Revolution)이라는 책을 쓸 만큼 자신만의 철학을 구축했던 인물이다. 그의 철학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자유장교단을 결성해 쿠데타를 일으키고, 1954년 총리에 올라 이듬해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인도의 네루와 함께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회의를 열고 비동맹 중립 외교정책을 추진한 데서 잘 드러난다. 대외적으로 미국도 소련도 아닌 비동맹 자주. 대내적으로 주요산업 국유화를 꾀하면서도 사유재산을 인정한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체제. 여기에 이슬람 형제, 하나의 아랍을 건설하자는 이슬람 아랍민족주의가 본질이다.
4) 2차 중동전: 미국 대 영국, 프랑스의 뒤바뀐 침략 전쟁
이런 배경 아래 국제관리를 받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길이 168km로 모세가 물을 갈랐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는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는 1869년 개통됐다. 명목상 터키제국의 관할이던 운하에 대해 각국은 이해관계가 얽혀 중립적인 관리를 원했지만, 최강 영국은 이에 반대하며 군대를 파견하고 자신의 관리아래 두려 했다. 1888년 오스만 투르크의 수도 이스탄불에서 국제관리에 합의하고도 운하를 폐쇄할 권한을 유지하고 있던 영국은 1차 세계대전 중에 터키와 독일이 운하 점령을 시도하자 운하를 폐쇄했고, 1922년 이집트가 독립한 뒤에도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 1936년 이집트와 조약을 맺어 영국군의 운하 주둔과 공동 보호를 유지한 것이다.
2차 세계대전으로 이탈리아와 독일이 다시 운하 점령을 시도하자 영국군은 운하 지배를 강화했다. 2차대전 이후 이집트는 주식 매입을 통해 점진적인 운하 국유화를 꾀했고, 그만큼 영국과의 갈등도 커져만 갔다. 반영 분위기가 고조된 것은 당연한 결과. 이런 상황에서 1952년 쿠데타를 일으킨 나세르는 1954년 영국과 조약을 맺었고, 영국군이 마침내 1956년 운하에서 철수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생겼다. 나세르가 영국군 철수 한달 만에 수에즈 운하회사의 국유화를 단행한 것이다.
군대를 철수시켰지만, 지배적인 이익을 놓치고 싶지 않던 영국은 그 해 10월 나세르가 운하를 봉쇄한 데 맞서 프랑스와 협력한 뒤 이집트 칠 궁리에 고심하던 이스라엘을 앞세워 수에즈 운하를 침공했다. 요즘 미국이 자신의 지배적인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 제국주의적인 침략전쟁을 중동 곳곳에서 감행하지만, 이는 베트남전쟁 이후의 일이다. 당시까지 국제관행을 무시하고 약소국을 짓누르던 나라는 오히려 영국과 프랑스였다.
5) 아이젠하워 "전쟁은 부당함을 치유하지 못해"
이집트가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비극적인 전쟁에서 이집트가 굴복 위기에 놓였을 즈음 미국이 나섰다. 표면적으로는 UN을 통해서다. UN은 긴급특별총회를 열어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군의 즉시 철수와 정전 감시를 위한 유엔군 파견을 결의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그 해 수에즈 운하에서 물러났고, 고집 피우던 이스라엘도 이듬해인 1957년 철수했다. 그러나, 전쟁을 종식시키고 중동에 평화를 가져온 실질적인 주역은 아이젠하워였다. 아이젠하워는 영국과 프랑스를 설득하는 한편, 이스라엘에 압력을 넣었다. 전쟁을 중단하고 철수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에 대한 모든 지원을 끊는 것은 물론 이스라엘을 유엔에서 쫓아 낼 수도 있다는 초강수를 뒀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이스라엘은 미국의 지지와 지원 없이는 전쟁은 커녕 생존도 보장받기 어렵다.
전적으로 아이젠하워의 공훈이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미국의 승리를 이끈 장군이건만 그는 전쟁을 아주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1956년의 제 2차 중동전 때 그는 참모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최근 중동에서 벌어지는 소란을 보면 관련국들에 의해서 고통받는 부당함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도구가 된다고 믿지 않는다. (In all the recent troubles in the middle East, there had indeed been injustices suffered by all nations involved. But I do not believe another instrument of injustice war is the remedy for these wrongs)" 참모들에게 전쟁과 평화에 대한 이런 깊은 통찰력을 들려주지는 못할 망정 고르바초프의 지적대로 강경 참모들에게 휘둘리는 부시 대통령. 그가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본받는다면 중동에서 전쟁과 테러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 어쩌면 좀 더 쉽게 생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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