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 하우스를 다루는 2가지 변명
월드컵 여록. 오늘은 끝으로 프랑크푸르트 괴테 하우스를 다룬다. 괴테가 태어나 라이프찌히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살던 고향집이 바로 프랑크푸르트의 괴테 하우스다. 라이프찌히에 가면 괴테가 주로 시간을 보내며 집필한 집이 나온다. 그곳이 괴테 작업의 산실이라면 프랑크푸르트의 집은 유년기 성장의 추억과 청년기 고뇌의 흔적이 배어 있는 장소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쓰던 무렵 까지 괴테의 족적을 간직한 곳으로 보면 된다. 다른 박물관들이 월요일에 쉬는 것과 달리 쉬지 않고 문을 여는 괴테 하우스. 문학에 관심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프랑크푸르트에 오면 꼭 들리는 명소로 특히 일본 관광객과 한국 관광객이 다수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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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테 하우스 입구에 있는 불가리 매장의 1억 2천만원짜리 손목시계. 너무 놀라 실어본다. ⓒ김문환> |
이번에 대규모 거리 응원이 펼쳐진 뢰메 광장과 함께 탐방 명소가 된 괴테 하우스에 대해 글을 쓰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한가지는 안타까움. 기자가 괴테 하우스를 탐방하는 3시간 동안에도 수많은 한국인들이 다녀갔다. 그런데 4층으로 된 괴테의 저택을 둘러보는 시간이 불과 몇 십 분도 안돼 보인다. 충실한 안내 자료를 들고 다니며 하나하나 유물의 의미를 곱씹는 탐방객도 참 드물다. 입구에서 돈을 내고 빌리는 한국어 안내 녹음기를 들고 다니는 학생 딱 한명과 마주쳤을 뿐 나머지는 변변한 안내 자료도 없이 그냥 둘러 본다. "여기가 괴테가 살던 집이구나!!" 이외의 감동이나 느낌을 안고 떠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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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테 하우스 전경. 4층 짜리 대형 저택이다. 현관으로 입장할수 없다. 오른쪽에 별도의 건물을 만들어 박물관 입구와 매장, 강당으로 활용한다. ⓒ김문환 |
야외의 거대한 유적은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인 영감을 전해주기 십상이다. 피라미드나 콜로세움,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렇지만, 박물관이나 생가는 다르다. 돈이 들더라도 꼭 안내 서적이나 안내 녹음기를 활용해 유물에 담긴 행간의 의미들을 찾아내 내 것으로 만들어야 진정한 탐방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거장의 혼과 숨결이 어린 곳, 더구나 뛰어난 예술작품을 지어낸 산실이거나 배경이 된 곳은 더욱 그렇다. 그의 숨결 하나하나는 아니더라도 좀 찬찬히 들여다보며 전후 맥락이라도 짚으며 다녀야 한다는 의견을 전하는 동시에 괴테하우스를 함께 하지 못하는 분들과 경험을 나누려 한다.
두번째 이유는 우리사회 거장의 생가나 유적에 대한 관리 실태와 비교하기 위해서다. 우리도 이제 문학이나 기타 예술 방면의 대가를 기리는 각종 기념사업이나 생가 복원, 전시관 마련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먹고 사는 문제에서 벗어나 무엇이 문화인지 되돌아보는 그런 여유를 어느 정도는 찾아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수 천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가운데 기록으로 남은 것으로만 따져도 고조선 말기부터의 문학작품을 갖고 있는 문화 민족으로서 늦었지만, 의미있는 위상과 자긍심을 정립하고 있는 단계다.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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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에서 본 현관 ⓒ김문환> |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마련하는 전시용 행정에 그쳐서는 안된다. 시민들 역시 그냥 사진 찍고 쉬는 차원의 공간을 넘어(물론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야 하지 않을까? 진정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번뇌와 성찰을 시로, 소설로, 그림으로, 노래로 담아냈던 그네들의 예술혼과 만나는 공간이란 자각이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거장들의 숨결이 살아있는 창작의 산실이 얄팍한 돈벌이에 희생되는 우를 더 이상 범해서는 곤란하다. 흠잡을 데 없는 보존과 관리, 운영 실태. 그리고 화석화된 전시장이 아니라 끝없는 재해석으로 시대에 맞춰 새로운 생명력을 불러일으키는 제2 산실의 기능. 모든 것을 충실하게 소화해 내는 괴테하우스는 타산지석으로 훌륭하다.
정열의 화신 괴테의 인생
여기서 잠깐 괴테의 인생을 돌아보자.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대가이자 자연과학자, 화가, 정치가로 활약한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능력이 너무 많고 그래서 원기 왕성하게 다방면에 큰 족적을 남긴 그는 멀리 조선 땅에서 새로운 학문의 기풍(훗날 후손들은 이를 실학, 實學이라 불렀다)이 거세게 몰아치던 1749년 태어났다. 법률가이며 무보수(재력이 있다는 것 의미) 왕실고문관을 지낸 아버지와 시장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그는 훗날 아버지의 인생에 대한 진지함과 엄격함, 그리고, 어머니의 풍부한 상상력을 이어받았다고 적는다. 좋은 것만 닮았다는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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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테. 3층 탄생의 방에 걸려 있는 초상화. ⓒ김문환> |
15세 때 첫사랑을 시작으로 74살에 19살 처녀에게 사랑??녕 난봉꾼으로 몰려 평범하게 살다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나이로 25살에 샬로테 부프를 만나 가슴 아픈 사랑을 경험한 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을 써서 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하고 이 작품의 인기를 바탕 삼아 이후 문학은 기본이면서 정치인, 자연과학자, 화가로 격동의 삶을 살며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23살에 쓰기 시작해 우리나이 84살로 죽기 1년 전 완성한 '파우스트'는 평생의 역작으로 꼽힌다. 바이마르 공국의 정치인으로 신뢰받으며 일한 그는 바이마르 대공가(大公家)의 묘지에 평생의 지기(知己) 실러와 나란히 묻혀 있다.
괴테 하우스는 괴테라는 거장이 어떤 가정 환경, 시대적 환경 속에 잉태됐는지 잘 보여 준다. 많은 사진을 소개하니 18세기 독일 사회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작지만 소중한 체험의 자리가 되길 바란다.
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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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엌. 연로와 그릇이 전시돼 있다. ⓒ김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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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수도를 설치한 모습. ⓒ김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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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안쪽에서 바라본 현관. ⓒ김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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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에도 쓰던 시계. ⓒ김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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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테 할머니가 화재같은 비상시에 각종 물건을 들고 나가기 좋게 1층 홀에 두었던 사물함. ⓒ김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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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당의 식탁. 이곳에서 괴테의 원고가 작성되기도 했다. ⓒ김문환 |
2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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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층 난간. 프랑스에서 시작돼 18c 크게 유행하던 로코코 양식의 난간 장식. 괴테의 아버지는 대부호이면서 학문적 예술적 취향이 남달랐다. ⓒ김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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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크푸르트 양식의 장롱. 이곳에 집안 전체에서 나오는 빨래감을 보관했다. 빨래는 요즘 처럼 필요할 때 마다 하는게 아니라 날을 잡아서 일년에 한두번 했다. 장롱이 크고 그 안에 많은 빨래감이 있어야 부자집 소리를 들었다. ⓒ김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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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양식의 장식. 18c 유럽에는 중국열풍이 불었다. 중국양식의 도자기와 그릇, 그림장식이 널리 쓰였다. 교양있고 기품있는 집인지의 여부는 중국 장식이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괴테의 아버지는 벽지도 중국장식으로 특별 주문해 만들었다. ⓒ김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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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포폴로 광장을 그린 동판화. 괴테의 아버지는 로마를 방문해 고대 로마제국의 유적에 매료 됐다. 어려서 이를 보고 자란 괴테는 나중에 문학의 거장이 된 뒤 아버지처럼 로마를 방문하고 마침 발굴이 시작되던 폼페이도 다녀왔다. 당시 유럽의 지성인이나 부유층은 이탈리아 여행이 부와 지식, 교양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훗날 괴테는 로마를 방문한 뒤 어머니에게 어렸을 기억에 대한 편지를 썼다. ⓒ김문환 |
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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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체시계. 3층 홀에 놓여 있다. 시계는 물론, 연월일과 달의 움직임등도 나타내 준다. ⓒ김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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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동생의 방. 괴테는 여러명의 형제가 있었지만, 다 어려서 죽고 남매만 남았다. 괴테가 하이델베르크나 라이프찌히로 대학교육을 받으러 갔을 때 괴테의 부모는 괴테의 여동생에게 고급 교육을 시키고 교양을 갖춰주는 일에 전념했다. ⓒ김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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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테의 여동생. 우수에 젖은 모습이다. 괴테의 여동생은 바로 이집에 살면서 결혼식을 했고, 피로연 파티도 이집에서 열렸다. 그러나, 결혼해 아기를 한명 낳은 뒤 우울증에 걸려 요절하고 만다.ⓒ김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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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테 여동생 방에 걸려 있는 괴테 여동생 친구의 초상화. ⓒ김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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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노가 있던 자리. 괴테의 여동생은 이금은 피아노 대신 비슷하게 생긴 가구를 가져다 놨다.ⓒ김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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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생의 방. 이곳에 괴테의 초상화와 함께 출생기록과 관련한 자료가 전시돼 있다. ⓒ김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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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테가 태어난 5일 뒤 그의 세례소식을 전하는 1749년 9월 2일자 프랑크푸르트의 신문. ⓒ김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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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테의 아버지. 괴테의 아버지는 재산을 일궈 부를 쌓은 뒤 무보수 황실고문관으로 일하며 학문화 교양을 다지는 일에 전념했던 인물이다. 괴테는 훗날 아버지의 인생에 대한 엄격함과 진지함을 배웟다고 술회한다. ⓒ김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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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테의 어머니. 괴테의 어머니는 시장 딸이다. 지체높은 집 출신이다. 괴테는 어머니의 강건한 신체와 풍부한 상상력을 이어받았다고 말한다. ⓒ김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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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불. 18c 프랑크푸르트에는 거리에 가로등이 없었다. 각자 가로등을 준비해 밤에 들고 다녔는데, 귀족은 초를 3개, 부유층은 2개, 평민은 1개씩 초를 넣고 다녀야 했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것이다. ⓒ김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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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테 아버지의 서재. 괴테 아버지는 당시 수많은 장서를 구비하고 개인도서관을 차린 뒤 괴테남매를 직접 가르쳤다. 괴테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학문과 문학에 대한 많은 영감을 얻었다. ⓒ김문환 |
4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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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층 홀. 오른쪽에 빨래 압착기가 보이고 문을 지나 시계, 그리고 중앙난방식 벽난로가 두짝의 여닫이 문으로 보인다. ⓒ김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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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층 홀에 있는 빨래 압착기. 요즘 다리미 같은 역할을 했다. ⓒ김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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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층 다락방크 푸르트 화가들이 그림을 그렸다. 프랑스 총독은 점령기간 동안 고급주택이던 괴테의 집에 머물렀다. 괴테의 아버지는 무척 불쾌하게 여겼지만, 어린 괴테는 자유분방한 프랑스의 분위기를 접하는 좋은 기회가 됐다.ⓒ김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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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루엣. 18c는 사진술이 나오기 전이다. 가까운 사람들끼리 서로의 모습을 보고 싶을 때 쓰던 방법이다. 얼굴 옆모습을 이렇게 실루엣으로 그려 서로 나눠 갖고 다니며 보곤했다. 그리울때. 참 운치있는 방법이다. ⓒ김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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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오콘 상. 18c는 그리스 로마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던 대다. 유적발굴을 통해 고대 그리스 로마에 대한 실상이 밝혀지고, 고대의 조각과 예술작품에 열광했다. 그래서 당시 작품을 석고로 떠 보관하는게 유행이었다. 괴테 역시 라오콘 상같은 고대 그리스 조각들을 석고로 떠 자신의 방에 보관하곤 했다. ⓒ김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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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형극장. 괴테의 외할머니가 선물한 인형극장이다. 괴테는 여동생과 함께 직접 대본을 써서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인형극놀이를 하곤 했다. 괴테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문학적 자질을 키워 나갔다. ⓒ김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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