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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열한 거리 - 서글픈 비열함

 오랜만에 칼럼으로 인사드립니다. 5월31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일주일 남짓 선거팀에 파견근무를 다녀오고 지금은 월드컵 때문에 스포츠 팀에 파견나와 있습니다. 전 세계인의 축제인 월드컵을 느긋하게 즐기지 못하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 그보다는 프로축구는 외면하면서 월드컵이나 국가대표 경기에만 열광하는 우리나라의 이상한 축구 열기와 토고전이 끝난 뒤 거리 응원에서 나타났던 일부 시민들-주로 젊은이들의 난장판 응원 문화의 위험성이 더 걱정됩니다.

영화계는 5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대공세에 한국영화가 맥을 추지 못해 저도 덩달아 맥이 빠져 있었고 2002년 관객수 급감을 경험했던 영화계는 월드컵이 열리는 6월은 아예 개봉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엑스맨 3] 개봉을 앞두고 참으로 오랜만에 할리우드 스타인 휴 잭맨이 방한해 붉은 악마 티셔츠까지 입어주는 배려를 했지만 월드컵 열기에 파묻혀 왔다갔는지도 잘 몰랐습니다. 영화 홍보 담당자는 휴 잭맨이 일본을 들렀다 중국 가는 길에 어렵게 스케줄을 빼서 방한 일정을 잡았는데 월드컵 때문에 가장 노출 가능성이 높았던 지상파 연예프로그램 편성이 줄줄이 죽는 바람에 참으로 난감하다고 하소연하더군요.

이런 와중에 유하 감독의 [비열한 거리]가 대담하게 그것도 [엑스맨3]와 나란히 개봉했습니다. 유하 감독은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라는 시집으로 유명한 시인이자 영화 감독으로 [결혼은 미친 짓이다]와 [말죽거리 잔혹사]로 흥행과 비평 모두 성공적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유감독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주인공 권상우가 쌍절곤으로 상대방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장면이 '폭력의 탄생'이라면, [비열한 거리]는 거기서 탄생한 폭력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소비되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라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포털의 노예로 전락하고 있는 일부 싸구려 영화매체들의 시각에서는 '조인성이라는 멋진 배우가 연기 변신한 또 하나의 조폭 영화'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 같지만 유 감독은 "권상우나 조인성은 내 영화를 관객들이 쉽게 섭취하도록 만드는 '당의정' 같은 배우"라고 밝혔습니다.

한국영화계는 그동안 걸핏하면 조폭영화라는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한국영화에 나오는 직업은 조폭 아니면 형사밖에 없다, 조직 폭력배를 의리에 살고 죽는 멋있는 그래서 사나이가 한번 해 볼 만한 비장미가 넘치는 직업으로 그려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 등등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조폭관련 영화는 꾸준히 생산되고 또 시장에서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조폭 느와르, 조폭의 무식함을 한껏 조롱하고 이용하는 조폭코미디 등 다양한 하위 장르로 분화, 발전하고 있는 상황인지라 이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됩니다.

삼류 건달 조직의 2인자인 병두(조인성)는 병든 노모와 두 동생을 부양해야하는 가장이기도 합니다. 밑바닥부터 쌓아 올라간 순혈(?) 조폭이 아니라 웨이터 출신이라는 성분 때문에 은근히 콤플렉스를 가져야하고 - 정규 부문에서 뿌리깊게 박혀있는 학벌이나 지연, 혈연 같은 연고주의가 조폭 세계에도 존재하는가 봅니다.- 보스도 떼인 돈이나 받아오게 하는 일이나 시킵니다.

집을 나와서 똘마니 대 여섯명과 합숙을 하고 있지만 후배들 거둬먹이기도 빠듯한 상황이고 어머니 병간호에 살던 집마저 재개발 철거로 내몰릴 위기까지 있어 떼인 돈 받아다가 보스에게 바치는 자리에서 조금만 더 생각해달라고 반항섞인 애걸을 하는 처지에 목좋은 자리에 성인 오락실 운영을 맡는 기회를 맡게 됩니다. 하지만 반대파의 도발로 오락실은 쑥대밭이 되고 그 와중에 죄를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가겠다는 후배에게 오락실 운영권을 빼았기게 되자 병두는 독기를 품게 됩니다. 보스와 사업 파트너로 성공한 사업가이지만 악랄한 부장 검사에게 쩔쩔매며 이를 가는 황회장(천호진)의 "너의 성공에 가장 필요한 사람이 누구이고 그 사람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은밀한 암시가 섞인 충고를 듣고 나름대로 인생의 승부수를 던집니다.

영화감독 데뷔를 앞두고 있는 병두의 동창 친구 민호(남궁민)는 조폭 영화로 입봉하려고 시나리오를 들이밀지만 약하다는 이유로 번번이 퇴짜를 맞다가 실제 조폭 세계를 생생하게 취재하기 위해 병두를 찾아옵니다. 병두는 민호를 믿고 스스럼없이 대하지만 민호는 자신의 영화를 성공시키려는 비열한 욕망으로 병두의 호의를 이용하고 병두는 심한 배신감을 느낍니다.

롱다리 꽃미남 조인성은 몸을 아끼지 않는 액션연기와 때로는 순수하고 귀여운 면도 갖춘 복합적인 성격의 병두를 잘 소화합니다. 천호진과 남궁민 등 조연들의 연기도 훌륭하고 특히 격투 장면은 정교하게 짜인 액션보다는 날 것 그대로의 원시시대 사냥터의 우리 조상님들 같은 몸짓을 보여줍니다.

영화는 조폭 세계의 물리적이고 현실적인 폭력과 영화감독 민호로 상징되는 지식계층의 비열하고 보다 파괴적인 폭력, 황회장으로 상징되는 합법적인 비즈니스 공간에서 벌어지는 자신의 손에는 피 한방울 안 묻히는 교묘한 폭력 등 우리 사회, 즉 천민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욕망 게임의 풍속도를 그리고 있습니다. 실제 조폭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지만 사실은 이런 먹이 사슬 속의 비열한 연결고리에 불과하다고 설파합니다. 영화를 보고난 뒷맛이 씁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영화에 서너차례 등장하는 룸살롱 악사를 처량한 표정에 우스꽝스러운 변장 내지는 분장의 기괴한 조합으로 배치시키는데 이 역시 끊임없이 새로운 척 해서 손님을 질리지 않게 하는 신선한 맛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우리 모두의 모습인 것 같아 이 영화의 주제인 '비루함' 내지는 '비열함'에 '서글픔'이라는 감상까지 덤으로 얹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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