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은미의 신 춘향‘을 봤습니다. ‘빡빡머리 무용가’로 잘 알려진 안은미 씨. 도발과 파격의 무용가로 유명한 그가, 민족의 고전이라는 ‘춘향’으로 만들어낸 작품은 어떤 모습일지, 이전부터 궁금했습니다.
‘신 춘향’은 지난달 영국과 벨기에, 이탈리아, 네덜란드 공연을 다녀왔습니다. 미스 사이공 취재차 영국에 출장 갔을 때 우연히 런던 거리에서 만났던 연출가 손진책 씨로부터, ‘신 춘향’의 런던 공연이 아주 재미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당시 일정만 맞았다면 런던에서 이 공연을 관람하고 관객들의 반응까지 볼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아쉬워했었습니다. 해외 관객들과 언론들은 아주 좋은 평을 했다고 합니다. 안은미 씨는 ‘동양의 피나 바우쉬’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는군요.
안은미 씨는 유럽 공연을 마치고 돌아와, 이 작품을 공동 제작한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에서 한국 관객들에게 선보였습니다.
우선은 찬란한 색깔들이 넘실대는 듯한 무대와 의상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붉은 색 무대 위에, 갖가지 색의 ‘보자기’들을 걸치고 등장하는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마치 색의 물결 같아 보입니다. 무용수들은 보자기를 공중에 던졌다가, 이불로 덮기도 하고, 어느 순간 허리에 두르고 치마로 삼기도 합니다. 이런 의상은 안은미 씨 자신이 디자인한 것입니다.
무대 전체를 휘감는 판소리와 국악기 연주는 음악 감독을 맡은 장영규 씨의 작품입니다. 중요한 대목에선 노래 부르는 사람이, 마치 나레이터 같은 느낌으로 무대 전면에 등장하기도 합니다. 음악은 전통적이면서도 아주 현대적인 느낌으로, 전체적인 작품의 색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작품을 보고 나서 장영규 씨 인터뷰도 요청했으나, 굳이 사양해서 결국 이야기를 직접 듣지는 못했습니다.
안은미 씨가 직접 춤춘 춘향은 원작에서처럼 꽃다운 10대의 처녀가 아니라, ‘혼기를 놓친’ 40대 노처녀로 설정됐습니다. 단순히 사랑에 빠진 여성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건강하고 주체적인 여성입니다. 현실에서의 안은미 씨 자신과 닮은 꼴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을 열거해 봅니다. 춘향과 이 도령이 함께 하는 첫날 밤, 춘향의 ‘목욕 재계’를, 물뿌리개로 물을 뿌리는 장면으로 형상화하고, 꽃나무 아래 꽃분홍 치마폭을 활짝 펼친 춘향에게 이도령이 다가가 치마폭으로 자신의 몸을 완전히 덮는 것으로 묘사됐습니다. 판소리에 맞춰, 고요하게 진행되는 장면이지만, 팽팽한 에너지가 넘칩니다.
변사또가 등장하는 장면은 코믹합니다. 교태를 부리는 듯, 사뿐사뿐 살랑살랑 등장하는 여성 무용수들의 춤에는 웃음기가 있고, 화려합니다. 변사또는 무대 상하 좌우를 오가면서 이들과 흐느적거리며 희롱합니다. 변사또가 돈에 ‘환장’한다는 것을 보여주듯 무대 위로 커다란 황금 돼지가 날아들기도 합니다.
춘향을 ‘꾀어보려’ 했으나 거절당한 변학도는 분풀이로 춘향의 머리채를 잡아 뜯는데, 이 장면은 안은미 씨 ‘외모’의 개인적 특성을 고려한 것입니다. 머리채를 뜯는 고문을 안은미 씨가 쓰고 있던 긴 머리 가발을 변사또가 벗겨 버리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공연 전반부에서는 가발을 쓰고 있던 안은미 씨의 ‘빡빡머리’ 본색이 드러나는 것이죠.
변사또와 이도령이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파격적인 설정도 있습니다. 실제로는 아니고, 옥 중 춘향의 어지러운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춘향이 무대 뒤쪽에서 굳은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 동안, 검은 옷을 입은 이도령과 변사또는 조용히, 느릿느릿, 서로를 탐색하고, 다가가고, 손을 스치듯 잡기도 합니다. 이 장면은 대본을 쓴 박용구 선생이 특히 강조했던 부분이라고 합니다.
춤사위는 전체적으로 아주 현대적이지만, 전통춤을 응용한 듯한 동작도 눈에 띕니다. 이도령 역을 맡은 무용수는 대만 사람이라는데, 긴 머리에, 아주 섬세하고 유연한 춤으로, 눈길을 확 잡아끌었습니다. 안은미 씨의 춤은 ‘밖으로 토해내는 몸의 절규’이면서도 모든 걸 한꺼번에 쏟아 붓진 않았습니다. 그의 춤은 결국 자신의 내면을 파고들고 있는 듯 했습니다.
안은미 씨는 자신이 안무한 출연작에서 벗는 것, 즉 상반신을 드러내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번 작품에서도 몇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거의 내내 상반신을 드러낸 채 춤췄습니다. 그의 주장은 당당합니다. 왜 남자 무용수의 가슴은 내놔도 되는 ‘아름다운 몸’이고, 여자 무용수의 가슴은 숨겨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여성의 가슴도 똑같이 ‘건강하고 아름다운 몸’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는 것이죠.
사실 개인적으로는 안은미 씨가 굳이 벗지 않아도 될 장면에서 벗는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안은미 씨의 춤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보다보면 ‘벗은 몸’이 야하거나 어색해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안은미 씨는 튀는 ‘빡빡머리’에 대해서도, ‘여성은 이래야 된다’는 고정관념을 깨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저는 ‘신 춘향’의 한국 공연에 앞서 열린 리허설을 취재해 리포트를 제작했습니다. 원래 지난 주말 8시 뉴스에 낼 예정으로 발제했으나, 월드컵 뉴스가 넘치는 바람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한국 공연도 끝나버려서, 결국은 ‘신 춘향’이 유럽 공연에서 호평을 받았다는 내용을 주로 해서 오늘 아침 뉴스에 냈습니다.
안은미 씨의 ‘신 춘향’은 첫 유럽 공연의 성공에 힘입어 내년에 다시 더 많은 나라에서 공연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저는 ‘신 춘향’을 아주 재미있게 봤습니다. 안은미 씨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유쾌했습니다. ‘튀는 무용가’ 안은미 씨는 앞으로도 계속 화제를 몰고 다닐 것 같습니다.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안은미 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방식으로 풀어낼 줄 아는 무용가라는 사실입니다.
(**안은미 씨의 인터뷰 내용은 제 블로그 http://ublog.sbs.co.kr/shkim0423에 올려놓을 예정입니다.)
화창한 봄의 절정입니다. 항상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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