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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트/이제야 좋아하게 된 절망 속 삶의 찬가

안녕하세요. 부슬비가 내리더니, 화창한 봄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남녘에서부터 꽃소식도 올라오고 있고요. 이렇게 좋은 날들,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요? &nsp; 저는 요즘 뒤늦게 뮤지컬 렌트에 푹 빠져 살고 있습니다. 지난 1월 한국을 다녀갔던

안녕하세요. 부슬비가 내리더니, 화창한 봄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남녘에서부터 꽃소식도 올라오고 있고요. 이렇게 좋은 날들,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요?

 

저는 요즘 뒤늦게 뮤지컬 '렌트'에 푹 빠져 살고 있습니다. 지난 1월 한국을 다녀갔던 '렌트' 브로드웨이 팀의 공연을 보고 '렌트'의 매력을 새롭게 깨달았고, 지금까지 '렌트'의 음반을 틈만 나면 듣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렌트'라는 노래가사가 가슴을 칩니다. 우리의 삶 역시 영원히 우리의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돌려줘야 할, 기한이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렌트'입니다.

 

얼마 전에 연극 '19 그리고 80'에서, 주인공 모드의 입으로,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다' 비슷한 말을 들은 것도 같습니다. 어쩌면 빤히 보이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이런 생각들을 하며 글을 썼습니다. 뮤지컬 잡지 '더 뮤지컬' 이번 호에 기고한 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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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보엠'과 '렌트'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은 내가 사랑하는 오페라다. 낭만의 도시 파리, 가난한 예술가들이 펼쳐내는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가 아름다운 음악에 실렸다. ‘그대의 찬 손’ ‘내 이름은 미미’ ‘무제타의 왈츠’ 같은 유명한 아리아들은, 한 번만 들어도 잊을 수 없는 흡인력을 지녔다.

 

나는 ‘라 보엠’을 볼 때마다 가난한 시인 로돌포와 수놓는 처녀 미미의 사랑에 가슴이 미어졌다. 로돌포의 친구인 화가 마르첼로와 그 연인 무제타의 티격태격하는 사랑은 나름대로 귀엽다. 다른 친구들인 철학자 콜리네, 음악가 쇼나르는 얼마나 인간적인가. 그야말로 가난하지만 젊고 낭만적인 ‘보헤미안’들의 모습 아닌가.

 

뮤지컬 ‘렌트’는 알려진 대로 ‘라 보엠’을 현대의 뉴욕으로 옮겨온 작품이다. 내가 ‘렌트’를 처음 본 것은 지난 2000년,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열렸던 국내 초연이었다. 작품의 명성은 익히 들었고 음악도 좋다고 느꼈지만, 에이즈와 마약 중독, 동성애 같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소재에 대한 생경함이 앞섰다.

 

이게 ‘라 보엠’의 현대판이라고? 등장인물들이 가난한 젊은 예술가이고, 여주인공의 이름이 ‘미미’이며 중병을 앓고 있다는 것 외에, 뮤지컬 ‘렌트’와 오페라 ‘라 보엠’의 연결점을 찾기란 힘들었다. 게다가 폐결핵을 앓는 미미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라 보엠’과는 달리, 죽어가던 미미가 ‘엔젤이 돌아가라고 했다’면서 소생하는 마지막 장면은 억지로 짜 맞춘 ‘해피엔딩’ 같기만 했다.

'렌트'를 다시 발견하다

지난 1월 브로드웨이 팀의 내한공연으로 ‘렌트’를 다시 만날 때도,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렌트’ 공연에 적합하다고는 할 수 없는 곳에서 공연됐던 것도 한 이유였다. 그러나 뜻밖에 ‘렌트’의 매력을 다시 발견하게 됐다. ‘라 보엠’에서 얻은 만큼의, 아니, 어쩌면 더욱 큰 감동을 ‘렌트’에서 얻었다. 이번에는 뉴욕 젊은이들의 삶과 정서를 보다 자연스럽게 표출할 수 있는 브로드웨이 팀의 공연이었기 때문일까.

 

록과 발라드, R&B, 가스펠, 탱고 등을 넘나드는 ‘렌트’의 음악은 ‘라 보엠’과는 전혀 다르다. 하지만 ‘렌트’의 음악과 대본을 쓴 작곡가 조나단 라슨이 ‘렌트’의 음악 속에 ‘라 보엠’의 확실한 흔적을 남겨놓았다는 것을, 이번에야 깨달았다. 공연 초반, 로저와 마크가 ‘집세를 안 내겠다’며 부르는 노래 ‘Rent'가 나오기 직전, 로저의 기타가 연주하는 멜로디는 ’라 보엠‘에 나오는 선율이었던 것이다.

 

단 몇 소절이긴 하지만, 이 선율은 ‘무제타의 왈츠’가 분명했다. ‘라 보엠’의 무제타는 ‘렌트’의 행위예술가 모린과 비슷한 인물이다. 무제타는 크리스마스 파티가 벌어지는 카페에서 자신의 미모를 과시하며 이 노래를 부른다. 아주 밝고 화려한 노래다. 그런데 ‘렌트’에서는 전혀 달리 들린다. 뭐랄까, 운명적인 느낌? 전기 기타 소리는 무척이나 강렬하고 절박하게 울려 퍼진다.

 

‘렌트’의 사랑 역시 절박하다. 시인 로돌포는 작곡가 로저가 됐고, 수놓는 처녀 미미는 마약중독의 댄서 미미가 됐다. 조나단 라슨은 미미 뿐 아니라 로저에게도 ‘현대의 폐결핵’ 에이즈라는 병을 줬다. 로저의 옛 여자친구는 에이즈에 걸린 사실을 알고 자살했다. 동성애 커플인 콜린스와 앤젤 역시 에이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에 비하면 ‘라 보엠’은 비록 미미의 죽음으로 끝나긴 하지만, 전체적인 색채는 훨씬 화사하다.

"우리에겐 오직 오늘뿐"

나는 공연 내내 로저에게 완전히 몰입했다. 미미 역의 막문위는 예쁜 패션모델 같은 느낌이 너무 강해서 미미에게 응당 있어야 할 ‘그늘’이 드러나지 않았다. 반면 로저 역을 맡은 제레미 커쉬너에게서는 로저의 그늘과 아픔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노래 한 구절 한 구절이 가슴 깊이 파고들었고, 장면마다 모두 이유가 있었다.

 

나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고, 오직 오늘 뿐’이라는 이들의 절규에 공감했다. 로저가 ‘One song glory’를 부를 때, ‘내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기고 갈 노래 하나’를 갈망할 때, ‘백조의 노래’를 떠올렸다. 죽기 직전에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는 백조. 그래서 ‘백조의 노래’는 예술가의 최후의 걸작을 이르는 말 아닌가.

 

로저는 죽어가는 미미 곁에서 자신이 항상 미미를 사랑해 왔음을,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노래가 바로 미미의 눈동자 안에 있음을 깨닫는다. 도입부에 나왔던 ‘무제타의 왈츠’의 선율은 이 때 다시 반복된다. 앞서 몇 소절만 나오다 말았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더욱 의미심장하게 마무리된다. ‘미미!’를 부르는 로저의 절규와 함께.

 

죽은 줄 알았던 미미가 깨어나는 것은 이 순간이다. 예전에는 어색해 보이던 결말을 이번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결말은 동화나 헐리웃 영화에 흔히 나오는 ‘그 후에도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류의 해피엔딩은 아니다. 로저와 미미는 여전히 에이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죽음이 언제 그들을 덮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로저는 절망을 이겨낼 해답을 찾아냈다. 로저의 해답은, 그가 찾던 노래는, 바로 미미를 향한 사랑이다. 그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죽음의 기운이 가장 극심한 순간에, 가장 절박한 순간에 깨달은 삶의 진실이다. 미미는 로저의 노래를 듣기 위해 죽음의 문턱에서 삶으로 돌아왔다. 고통과 절망이 깊을수록 더욱 빛나는 사랑이 있기에, 우리의 삶은 아름다운 것이다.

조나단 라슨, 그리고 나.

‘우리에겐 오직 오늘뿐’이니, 후회는 잊고 사랑하라! 로저도, 미미도, 엔젤도, 모두 나와서 “1년은 ’52만 5600분‘, 순간순간을 사랑으로 채우자”고 노래하는 피날레를 보면서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울컥 솟구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7년 동안 준비한 ’렌트‘가 무대에 올려지기 하루 전 요절했다는 조나단 라슨의 모습이 오버 랩 됐다. 그러고 보니 ’렌트‘는 조나단 라슨의 ’백조의 노래‘였던 것이다.

 

나는 로저에게서 계속 조나단 라슨을 봤나 보다. 조나단 라슨에겐 또 다른 ‘자전적’인 뮤지컬 ‘틱틱 붐’도 있지만, ‘렌트’에서도 결국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조나단 라슨 자신은 대동맥 혈전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삶을 건 예술‘을 했다는 점에서 그는 로저와 같았다.

 

조나단 라슨은 ‘해답은 사랑’이라고 외친다. 주인공이 폐결핵 환자든 에이즈 환자든, 동성애자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삶이고, 사랑이다. 그러고 보니 ‘라 보엠’도 ‘렌트’도 결국은 우리들 얘기다. 중병 환자가 아니더라도,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 인간의 삶이란 얼마나 불확실하고 절박한 것인가. 그리고 이 삶을 희망의 광채로 채우는 것은, 바로 사랑 아닌가.

 

내가 ‘렌트’를 본 날은 조나단 라슨의 기일 사흘 전이었다. 그는 1960년 2월 4일에 태어나 1996년 1월 25일에 숨졌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의 나이가, 지금 내 나이와 같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나와 비슷한 햇수를 살고 세상을 떠난 사람이 남긴, ‘절망 속에서도 빛나는 삶의 찬가’를 보며 나의 삶을 생각했다.

 

나는 ‘라 보엠’을 사랑하듯, 조나단 라슨의 뮤지컬 ‘렌트’를 사랑하게 됐다. 사람들은 ‘렌트’가 ‘젊은 뮤지컬’이라고 하지만, 둔감한 나는, 오히려 나이가 들어 ‘인생의 쓴 맛 단 맛’을 조금 더 보고서야, ‘렌트’를 제대로 즐길 수 있게 된 것 같다. 정말이지,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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