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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샌디에이고

그렇게 화창하다는 샌디에이고 날씨가 스산하다 못해 부슬부슬 비까지 내리는 것을 보고 영 찜찜하다 싶었다. 우리 선수들이 우중경기에 더 강한 이유가 돔 구장 하나 없기 때문이라는 기사를 읽으며 억지 위안은 했지만 서울의 봄보다는 도쿄의 초겨울

그렇게 화창하다는 샌디에이고 날씨가 스산하다 못해 부슬부슬 비까지 내리는 것을 보고 영 찜찜하다 싶었다.

우리 선수들이 우중경기에 더 강한 이유가 돔 구장 하나 없기 때문이라는 기사를 읽으며 억지 위안은 했지만 서울의 봄보다는 도쿄의 초겨울에 더 가까운 분위기에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한번 그런 예감에 휩싸인 뒤에는 보는 것마다 의심스럽다.

조 1위로 올라간 덕에 홈팀이 돼 하얀 유니폼을 입은 우리 선수들이 어쩐지 점잖은 선비 같았다면 만화에 나오는 우주 전사 같이 치장한 일본 팀은 싸울 준비가 돼 있어 보였다.

불길한 예감이 적중할 때의 짜증스런 심정이란…

경기 시작부터 팽팽한 투수전이 펼쳐졌다.

특히 일본 선발 우에하라의 구위에는 독기가 서려있었다.

이종범, 이승엽, 최희섭으로 이어지는 라인 업이 작심하고 배트를 휘둘러도 번번히 파울이 나는데 거의 한결같이 당기지 못하고 밀려 맞는 방향이다.

그리고는 악몽의 7회.

스포츠에서 맞수끼리의 승부란 마치 홍수에 둑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

버티다 버티다 순식간에 모든 인내가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다.

실력은 간발의 차이에 불과해도 점수는 터무니 없이 벌어지기 일쑤다.

그 해의 베스트 두 팀이 맞붙는 미국 수퍼볼도 번번히 큰 점수차로 승부가 갈린다고 하지 않는가.

한번 승기를 잡으면 방망이든 공이든 몇 배로 크게 보이는 법인가 보다.

반면 둑이 무너진 우리 팀 선수들은 근육의 탄력을 잃었다.

경기는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지만 관중석에서 벌어진 또 다른 경기는 한국의 압승이었다.

붉은 악마도 없었고 따로 응원석이 마련된 것도 아니었지만 우리 교민들은 남가주 지역의 압도적인 교민 분포를 기반으로 뜨거운 응원을 펼쳤다.

패색이 짙어가는 9회 말까지 비와 추위에도 불구하고 한결 같이 자리를 지키며 대~한.민.국을 외치는 모습이 고마웠다.

우리가 이기기는 했어도 샌디에이고의 한일간 응원전은 서울이나 도쿄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한국 관중들에 포위돼 마치 독도처럼 외롭게 모여 앉아서도 거리낌 없이 일장기 흔드는 일본인들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우리 쪽에서 대~한.민.국을 목청껏 외치다 잠시 숨 돌릴라 치면 어김없이 ‘이치로 파이팅’이나 ‘Go Japan’ 같은 구호가 끼어들었다.

그 모습에 한국 관중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박수까지 쳐주면 일본 관중들도 뭐가 그리 좋은지 낄낄거리며 목소리를 더 높이곤 하는 것이었다.

한 일본인 관중이 손에 들었던 일장기를 떨어뜨린 것도 모르고 걸어가자 뒤따르던 한국인 관중이 집어 건네주는 장면도 목격됐고 비를 피해 천장 안쪽으로 사람들이 몰렸을 때는 한.일.한.일.한.한.한.일 같은 순서로 서로 어울려 경기 재개를 기다리기도 했다.

샌디에이고 펫코 경기장은 이를테면 한·일 갈등 자유지대였다.

일본인들 몇몇을 인터뷰했다.

"한국이 너무 강해서 일본은 정신력으로 이긴 겁니다.”

"한국 선수들도 참 잘했습니다. 하지만 세 번 붙어서 세 번 다 이길 수는 없잖아요.”

대부분 이런 대답들이다.

한 일본인은 "어쨌든 아시아 팀이 4강에 나란히 오른 게 자랑스럽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당신 지금 아시아 운운하는 게 혹시 대동아 공영권 얘기하는거 아냐?’라는 속 좁은 생각도 들었지만 얼른 뱃속으로 삼켰다.

그는 고통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유학생일 뿐이다.

사실 해외에 나와 보면 일본인들은 한국인보다 훨씬 더 외롭다.

많은 외국인들은 엔화의 달콤한 맛을 노려 겉으로는 일본인들을 그럴 듯 하게 대접하지만 뒤로 돌아서면 그만이다.

역사에 씻지 못할 죄를 짓고도 별로 뉘우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일본 낡은 세대가 남긴 업보다.

유엔과 저개발 국가들에 그토록 돈을 쏟아 붓고도 안전보장 이사회 진출이 난망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래서 그런지 외국에 나가면 일본인들은 한국 사람만 보면 좀 친해보려고 기웃거리는 경향이 있다.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드는 모양이다. 일방적인 친근감인 셈이다.

대학 시절 기숙사에 나오키라는 일본 유학생이 있었다.

늘 외롭게 지내는 게 안쓰러워서 한국 학생들끼리 어울릴 때 몇 차례 끼워줬더니 그 날부터 우리 뒤를 졸졸 따라 다니며 반 한국인이 됐다.

그는 일본 유수 증권회사의 중간 간부가 된 지금껏 공개적이고 적극적인 친한파로 남아 있다.

외로운 일본인.

해방 60년이 넘도록 나아지는 게 없는 한일 관계를 개선할 단초가 여기에 있을 수도 있다고 하면 지나친 확대 해석일까.

따질 건 따지고 책임을 물을 건 묻더라도 외로운 사람들을 때때로 가슴에 품어 주면 달라지는 게 있을 법도 하다.

어제에 대한 인식이 없는 일본의 젊은이들이 특히 좋은 대상이다.

기성세대의 집요한 국민 교육에 현혹돼 똑같은 역사인식으로 무장하기 이전에 우리가 먼저 그들의 마음을 사는 것이다.

잘못한 쪽이 먼저 고개 숙이고 나와야지 피해자인 우리가 뭣 하러 그러냐는 볼멘 소리는 잠시 접어 두자.

역사가 아무리 약육강식의 반복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옹졸한 민족 보다는 가슴 넓은 민족이 더 잘 살아 왔다.

이젠 뭐, 일본의 국기라는 야구에서도 3판이면 우리가 양승을 하는 세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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