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랜만에 편지 띄웁니다. 며칠 전 문화계의 지인으로부터 '왜 요즘은 메일 안 보내주느냐'는 책망을 받고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이제 정말 ‘연말’입니다. 12월도 절반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요?
저는 한동안 ‘줄기세포’ 때문에 바빴습니다. 제가 소속된 부서가 문화‘과학’부라서, 비록 문화 담당 기자라 해도, 1달을 넘게 끌어온 줄기세포 관련 뉴스들과 무관하게 지낼 수 없었지요. 그러다 지난주 목요일, 전주로 짧은 출장을 다녀오면서 오랜만에 공연을 취재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본 공연은 전주에서 열린 베를린 교향악단과 칼 포스터 합창단의 내한공연이었습니다. 서울 공연은 일요일이었는데 일정이 도저히 맞지 않아 미리 취재하려면 지방 공연을 봐야 했습니다. 사실 공연을 취재하기 위해 지방에 가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인데, 제가 전주까지 갔던 이유는 공연 프로그램 때문이었습니다. 안익태 선생의 한국 환상곡을 연주했거든요.
한국 환상곡은 안익태 선생이 1938년 아일랜드에서 초연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애국가가 주요 주제로 사용돼서, 한국 사람들에게는 좀 특별한 곡이라고 볼 수 있지요. 아마 합창단이 애국가를 노래하는 후반부는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일제침략이나 6.25 전쟁 같은 고난과 역경을 넘어 희망으로 나아가는 우리 민족사의 발자취를 그려낸 서사시 같은 작품입니다.
안익태 선생은 이 곡을 유럽의 오케스트라와 십여 차례 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선생의 사후에는 외국 오케스트라들이 연주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곡을 독일의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연주한다는 사실이 저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서양인들이 부르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 어떨지 궁금했던 것이지요.
칼 포스터 합창단은 한국인 유학생으로부터 한국어 가사를 지도받으며 이 곡을 두 달 반 동안이나 연습했다고 합니다. 이들의 발음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가 잘 들렸습니다.
대규모 편성의 합창이 주는 전율 같은 것은 부족했습니다. 좀 더 힘차고 우렁찬 발성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좀 약하게 들렸습니다. 오케스트라 연주와 합창이 함께 고조되며 격정적인 ‘만세, 만세, 만세, 만세~’를 외치는 부분에서도 이들의 ‘만세’는 ‘만세’처럼 들리지 않았습니다. 주최 측은 공연장에 음향 반사판이 하나도 없어서 소리가 퍼졌던 것도 한 원인인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한국 환상곡은 중간 중간 민요에서 따온 듯한 모티브도 등장하고, 전통 국악기를 연상시키게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베를린 교향악단은 이런 부분을 비교적 맛깔스럽게 소화해 냈습니다. 같은 베를린에 근거지를 둔 ‘베를린 필하모닉’의 압도적인 명연에는 못 미치지만, (공연 주최사는 ‘베를린 교향악단’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이름이 비슷하다보니, ‘베를린 필하모닉’이 또 오는 것인지를 묻는 전화를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베를린 교향악단의 연주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독일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연주로 ‘한국 환상곡’을 현장에서 듣는 것은, 정말이지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이들은 한국에 오기 전에 독일 베를린에서도 한국 환상곡을 연주해 독일 청중들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 곡이 세계인이 함께 즐기는 보편적인 레퍼토리로 자리잡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물론 베를린 교향악단의 프로그램 선정은 내한공연을 주최한 한국측 회사와 협의한 결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의미를 폄하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베를린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 리오 샴바달은 인터뷰에서 이 곡을 자연에 대한 묘사와 민속음악의 선율로 가득 찬, 후기 낭만주의 경향의 곡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안익태 선생이 한국인이긴 하지만, 이 곡 자체는 ‘유럽적(European)'이라면서, 연주에 어려움은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한국적 선율이 포함되긴 했으나, 서양음악의 문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것이죠.
저는 독일인이 연주한 한국 환상곡에 한국의 청중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습니다. 지난 2001년 해체되기 전 금호 현악 4중주단이 독일 라인가우 음악제에서 초청 연주회를 열었을 때 동행 취재했었습니다. 당시 금호 현악 4중주단은 앙코르로 하이든의 현악 4중주 ‘황제’ 2악장을 연주했습니다. 이 악장은 아시다시피 독일 국가의 멜로디가 변주되는 부분입니다. 앙코르가 끝나자 독일 청중들은 모두 기립해서 열광적인 갈채를 보냈습니다. 물론 연주도 좋았지만, 자기네 국가를 연주한 ‘센스’를 높이 산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날 ‘한국 환상곡’에 보인 한국 청중들의 반응은, 적어도 제 예상보다는 덤덤한 것이었습니다. 박수 소리는 물론 컸지만, 기립은 없었고 환호도 없었습니다. 저는 30분 가까이 되는 한국 환상곡이 연주되는 동안 관객들이 이 곡을 굉장히 낯설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국인이 작곡했고 ‘애국가’가 들어있긴 하지만, 이 곡은 비교적 ‘현대의 음악’에 가까운 작품이니까요.
2부에서 연주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에 열광적인 환호와 앙코르 요청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서 다시 한번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합창’이 피날레 곡이었던 데다, 독일 교향악단과 합창단이 아무래도 베토벤의 작품에서 더 실력을 발휘한 탓이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저만 해도 ‘한국 환상곡’보다는 ‘합창’을 들을 기회가 많았던 게 사실입니다. 다른 관객들도 그래서 서양 클래식 음악 중에서도 친숙한 ‘고전’인 ‘합창’을 더욱 편안하게 감상하고 뚜렷한 반응을 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이 길어졌습니다. 건강하게 연말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편지 한두 통은 더 쓸 생각인데, 그래도 성탄 인사는 미리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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