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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나폴리 8-이탈리아

지중해 문명기 5권BR 모자이크로 읽는 그리스 로마 문명BR(At of Mosaic and GecoRoman Civilization) 고대의 삶과 사랑 BR2장. 테세라 모자이크의 세계 &

-- 지중해 문명기 5권--

모자이크로 읽는 그리스 로마 문명
(Art of Mosaic and Greco-Roman Civilization)

--고대의 삶과 사랑--


2장. 테세라 모자이크의 세계

 

2.이탈리아

 

1,2,3)로마(Rome) 1,2,3

4,5,6,7)바티칸(Vatican)

8,9,10,11)오스티아(Ostia)1,2,3,4

12)폼페이(Pompeii)

13,14)에르콜라노(Ercolano)1,2

15,16,17,18, 19, 20,21,22, 23,24)나폴리(Napoli)1,2,3,4,5,6,7,8,9,10--오늘 이야기

25,26)팔레르모(Palermo)

27,28,29,30,31,32,33,34,35,36)피아짜 아르메리나(Piazza Armerina)

 

22)나폴리(Napoli) 8

 

◆8. 모자이크 전시실 4번방 1


나일강을 묘사한 풍경을 지나면 나폴리 박물관 모자이크 전시실의 마지막 공간 즉 4번방이 나온다. 이곳에는 폼페이 파우노의 집 야외식당, 즉 엑세드라(Exedra)의 바닥을 장식했던 거대한 모자이크가 기다린다. 모자이크의 대명사로 불릴 만큼 널리 알려진 작품이어서 그런가. 전시실 가장 안쪽 깊숙하게 보존돼 있다. 다른 모자이크의 경우 눈앞에서 바로 볼 수 있도록 걸어 놓은 것과 달리 투명 유리로 차폐막을 쳐 벌써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모자이크임을 직감한다. 무슨 모자이크인가? 마케도니아의 정복왕 알렉산더가 당시 세계 최대제국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와 벌였던 이수스(혹은 과가멜라) 전투 모자이크다. 페르시아 제국의 멸망과 헬레니즘의 시작이라는 역동적인 역사 소재를 다뤘다는 점에서 일단 주목을 끈다.

 

역사적인 무게에 걸맞게 규모도 커서 보는이를 압도한다. 세로 2.7m에 가로 길이는 5.12m다. 무려 백 50만개의 미세한 테세라를 사용한 대작이다. 헬레니즘 시기 모자이크 설치 예술가들이 선호했던 흑(黑), 백(白), 적(赤), 황(黃)의 4가지 색을 사용해 전체적으로 중량감 있는 장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쟁이란 주제 표현, 나아가 세계사의 한 획을 그은 묵직한 사건에 적합한 색상이다. 장쾌한 전투장면과 등장인물의 생생한 표정 묘사가 뛰어나다. 힘차고 역동적인 말들의 움직임도 사실성을 더해준다. 로마가 헬레니즘 세계를 정치적으로 붕괴시킨 뒤인 B.C 2c 말이나 B.C 1c 초 작품으로 추정된다.

 

알렉산더와 다리우스의 전투 전경--폼페이 [파우노의 집] 여름철용 야외식당인 엑세드라의 바닥을 장식했던 작품이다. 공격을 주도하는 알렉산더와 그리스군의 용감한 모습. 이와달리 겁먹은 다리우스와 페르시아군의 도망가려는 듯 꽁무니를 빼는 모습이 대조적으로 묘사됐다. 바지를 입은 페르시아 병사의 독특한 복장도 잘 나타냈다. 나폴리 박물관. ⓒ김문환

 

이 작품은 헬레니즘기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몇 가지 결점을 찾아냈다. 일부 인물이나 말에서 신체구조의 비례가 맞지 않는 점. 따라서 어색하게 표현됐다는 것이다. 이는 두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한 곳에서 작품을 완성한 것이 아니라 미리 전문 생산공장에서 만들어 둔 판넬을 실제 모자이크를 설치하는 장소로 옮겨 붙이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라는 주장. 둘째, 독일학자가 내세운 것으로 색다르다. 헬레니즘 문화권의 지중해 동부 어딘가에 설치했던 작품인데, 로마인들이 이 지역을 정복한 뒤 강탈해 폼페이에 다시 설치하면서 생긴 결과라는 지적이다. 최근엔 후자가 더 설득력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알렉산더의 일생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자. 알렉산더의 고국은 마케도니아. B.C 359년 부친 필리포스 2세가 왕이 됐을 때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오랜 내전으로 피폐(疲弊)해져 있었다. 필리포스 2세는 고분고분하지 않던 귀족들을 길들이고, 각 지역 호족들의 준동을 잠재운 뒤 마케도니아를 강력한 군사국가로 탈바꿈 시켰다. 이후 힘빠진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하나씩 제압했다. 마침내 B.C 338년 그리스의 모든 도시국가들을 굴복시키고 헬라스 동맹을 결성해 맹주가 됐다. 그리스 역사에서 처음 등장하는 단일 지도체제다. 모든 도시국가의 위에 군림하는 패자(覇者) 마케도니아가 등장한 것이다. 필리포스 2세는 이어 마케도니아를 주축으로 도시국가들을 참여시킨 페르시아 정벌 연합군을 조직했다. 그러나, 페르시아 원정에는 나서지 못했다. B.C 336년 암살되면서 아들 알렉산더에게 왕위가 넘어갔기 때문이다.

 

알렉산더와 페르시아군--알렉산더가 맹렬히 페르시아 군을 몰아치는 장면을 그렸다. 나폴리 박물관. ⓒ김문환

 

20살에 왕이 된 알렉산더는 B.C 323년 33살로 죽을 때까지 13년간 빛나는 업적을 쌓았다. 알렉산더는 아버지의 죽음 뒤 잠시 혼란해진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평정한 뒤 B.C 334년 연합군을 이끌고 페르시아 정벌길에 올랐다. 알렉산더는 B.C 333년 오늘날 터키 남부지방인 이수스에서 페르시아 다리우스 3세가 이끄는 대군을 격파했다. 이 전투로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의 오리엔트를 차례로 점령할 수 있었다. 이어 찬란한 문명의 보고 이집트를 차지한 뒤 페르시아 제국의 심장부 즉, 메소포타미아 내부로 들어갔다. B.C 330년 오늘날 이라크 북부의 과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에게 대승을 거두고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켰다.

 

이제 발길 닿는 대로 알렉산더의 세상이었다. 문명의 고도 바빌론,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거쳐 카스피해까지 간 뒤, 북동진해 서역(西域)이라고 불리는 중앙아시아로 진출했다. 인도정벌을 위해 남하했지만, 결국 인더스강에서 원정의 발길을 돌린다. 알렉산더는 가는 지역마다 자신의 이름을 따 무려 70개의 도시(알렉산드리아)를 만들었다. 그가 다닌 궤적은 당시까지 전쟁사에서 가장 넓은 지역에 퍼져 있었다. 영토의 확장뿐 아니라 동서 문화의 융합이라는 헬레니즘시대를 열었으니 세계 문명사에 기여한 바도 크다. 우리의 자랑스런 세계 문화 유산, 석굴암 불상(佛像)도 사실은 그가 남긴 간다라 미술의 후예다.

 

신이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는 위업. 스스로의 업적에 자부심을 가진 알렉산더는 이미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정복했을 때 자신을 신으로 대접하라는 통지를 보낸 바 있다. 페르시아 전쟁을 시작한 뒤로는 이집트의 시와 오아시스 아몬 신전에서 마침내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결혼에 무심했던 그는 29살이던 B.C 327년 초 추운 겨울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박트리아 지역을 공략할 때 전투를 조기에 마무리 짓기 위한 방편으로 결혼을 선택했다. 평화가 필요한 상황에서 페르시아 출신의 공주와 정략결혼식을 올렸던 것이다. 희대의 영웅 알렉산더와 만난 박트리아 공주의 이름은 록사네다. 그러나, 로맨스도 잠시. 친구 헤파이스티온이 B.C 324년 10월 죽으면서 알렉산더에게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알렉산더--투구도 쓰지 않은 채 공격에 몰두하는 알렉산더를 의연하게 그렸다. 알렉산더의 갑옷 한가운데 메두사의얼굴이 그려져 있다. 페르세우스가 메두사를 죽인뒤 그녀의 목을 아테나 여신에게 바쳤고, 아테나는 목을 자신의 방패에 박았다. 적군 누구라도 메두사의 얼굴을 보고 겁을 먹으라는 취지였다. 그리스인들의 이런 전통을 나타내주는한 단면이다. 나폴리 박물관. ⓒ김문환

 

헤파이스티온은 인도원정을 마치고 돌아와 수사에서 알렉산더가 주도한 페르시아 왕녀들과의 성대한 합동 결혼식을 치른 지 8달 만에 죽었다. 아름다운 신부를 뒤로 하고... 메드 지방(이란 고원지대로 오늘날 터키와 이라크, 이란의 국경지방) 엑바탄(에크바타나)에서 최후를 맞았다. 헤파이스티온이 죽자 알렉산더는 크게 상심했다.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폭음을 일삼았다. 그러면서도 예정됐던 아라비아 침공 준비는 그대로 진행시켰다. 아라비아 원정이라! 아라비아를 거쳐 이집트로 들어간 뒤, 리비아를 지나 서지중해의 강자 카르타고를 정복하고 새롭게 세력을 키워가던 로마도 평정한다는 야심찬 원정 계획. 몇 년이 걸릴지 모를 대역사. 아라비아로 출정 예정일은 B.C 323년 6월 20일-23일 사이에 잡힌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출정을 20여일 앞둔 6월 3일 저녁 향연 석상에서 과음하던 알렉산더가 쓰러졌다. 그리고, 열흘만인 6월 13일 숨을 거뒀다.

 

알렉산더는 죽기 전 자신이 신으로 축복받은 이집트 서부의 사막 시와 오아시스를 매장지로 택하고 유언한 것으로 보이지만, 묘소는 과연 어디였을까? 수구초심(首丘初心)이면 마케도니아인데... 알렉산더의 갑작스런 죽음은 큰 혼란을 가져왔지만, 장례절차는 차분히 진행됐다. 우선 이집트의 전문가를 불러 시신을 미이라로 만들었다. 미이라를 운구할 장엄한 석관도 준비했다. 제작기간만 무려 2년이 걸렸으니... 석관을 운송하기 위해 수백마리의 노새와 낙타가 동원돼야 했다. 장지는? 고국 마케도니아로 향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지만, 당시 이집트 총독이던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이 시리아에서 영구마차를 강탈해 이집트로 가져갔다. 전혀 엉뚱한 이유로 알렉산더의 시신은 그가 소망했던 나라로 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찾을 길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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