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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Perla의 저주

BR워싱턴 중심가 펜실바니아 거리에 La Pela라는 이태리 식당이 있다. 우리 주미 대사들이 자주 찾기 때문에 특파원들에게도 조금은 알려진 곳이다. 안기부 불법 도청 사건에 휩싸여 낙마한 홍석현 대사의 얘기를 풀어가려는데


워싱턴 중심가 펜실바니아 거리에 La Perla라는 이태리 식당이 있다. 우리 주미 대사들이 자주 찾기 때문에 특파원들에게도 조금은 알려진 곳이다. 안기부 불법 도청 사건에 휩싸여 낙마한 홍석현 대사의 얘기를 풀어가려는데 언뜻 이 식당이 머리에 떠올랐다.

홍 대사의 화려한 이력과 야심찬 꿈, 97년 대선 불법 개입의 업보, 그리고 짧은 워싱턴 생활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게 축적한 어록까지 장황하게 써내려 간 게 지난 휴일 아침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우리 동기 심석태 기자의 블로그에 들어가 보니 이미 홍 대사에 대한 깔끔한 포스트가 게재돼 있는 것이었다. 굳이 내가 비슷한 애기를 반복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망설임 없이 취소 버튼을 눌렀다.

그래도 뭔가 아쉽다.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인생을 통틀어 성공과 실패의 스펙트럼이 그처럼 넓은 사람도 찾아 보기 힘든 인물인 만큼 그냥 무시하기 어려운 글감이다. 넘치는 욕심을 내 글 재주의 초라함을 핑계로 접어 두고 소소한 에피소드나 하나 전하고 마무리 하기로 마음 먹는다.

La Perla Restaurant. 베네치안 르네상스의 화려한 미술 작품들에 둘러싸여 품격있는 이탈리아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이 식당이 홍 대사의 낙마로 주미 한국 대사들에게는 저주가 돼 버렸다. 전임 한승주 대사에 이어 홍석현 대사 마저 이 식당에서 특파원들과 오찬을 한 것이 대사직을 내놓는 분수령으로 작용한 것이다.

먼저 한승주 전 대사.

지난 해 몇몇 특파원들과 La Perla에서 점심식사를 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이른바 LA 발언에 대해 언급했다. 노 대통령이 LA에서 미국을 자극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것을 듣고 화들짝 놀라 APEC이 열리는 칠레 산티아고까지 좇아가 대통령을 설득했다는 설명이었다.

이 말이 일부 언론에 보도되면서 한승주 대사는 내리막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정권 핵심부에서 한 대사에 대한 불만이 슬금슬금 흘러 나오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업적과 노고에 비할 때 그리 유쾌하다고 볼 수 없는 뒷모습으로 워싱턴을 떠나야 했다.

이어서 홍석현 대사.

안기부 불법 도청 사건이 불거지기 불과 며칠 전에 역시 La Perla에서 워싱턴 특파원단 신임 간사들과 점심을 나눴다. 딱히 정치적인 발언은 없었지만 대사라기보다는 언론사 오너의 냄새가 더 진한, 예의 자신감 넘치는 대화가 이어졌다고 참석한 기자들은 전한다.

그것이 홍 대사에게는 특파원들과 웃으면서 얼굴을 마주한 마지막 자리가 됐다. 며칠 못가 관저와 대사관에 진을 치고 파문에 대해 어떤 말을 할지 충혈된 눈으로 대사의 입을 주목하는 늑대 같은 (나를 포함해) "기자정신"이 대사 주변을 에워쌌다.

홍석현 대사는 평생 실패를 모르고 살아온 사람이다. 97년 대선 때 이회창 후보를 편파적이고 불법적으로 지원했다가 조세포탈범의 낙인이 찍혀 감옥살이까지 한 게 첫 실패였다. 노무현 정부 들어 주미 한국 대사 자리에 앉은 것은 개인적으로 그런 실패를 만회하고 더 큰 도약을 노리는 중요한 기회였다.

그러나 5개월 남짓을 짧은 임기는 오히려 도약까지 도움닫기하는 홍 대사의 발목을 결정적으로 잡는 계기가 돼 버렸다. 재산 공개 파문에서 유엔 사무총장 출마 논란까지 외교와 무관한 구설수에 시달리다 결국 안기부 불법 도청 파문을 맞았다.

홍 대사는 99년의 감옥 생활이 첫 실패의 대가로 충분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현실은 더 가혹했던 모양이다. 두 번째 실패의 상처는 죄값을 갚고 다시 도약을 시도하기에는 너무 크고 깊을 게 분명해 보인다.

홍 대사가 잇딴 실패를 만회할 방법은 하나 뿐이다. 그가 스스로 술회한 도청 파문에 대한 소회가 그 방법을 잘 요약해 준다.

"이번 사건으로 상처입은 국민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이번 사건이 우리 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가는 기폭제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쓰잘데 없는 미신이기는 하지만 새로 부임하는 대사는 아예 이 식당에 안 갔으면 하는 소망도 없지 않다. 그래도 꼭 한 번 가보고 싶어하는 미식가들을 위해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La perla가 대표 선수로 내세우는 요리는 조개와 게, 바닷가재 등 갖가지 해산물을 한데 삶은 Treasure of the Sea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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